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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언 시인 / 비밀의 목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김도언 시인 / 비밀의 목적

김도언 시인 / 비밀의 목적

 

 

 나, 목적이 없는 비밀을 갖고 싶은 적 있었죠. 그것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처럼 죽어가는 나뭇가지를 한번쯤 손으로 받쳐주는 일이거나 햇볕 쨍쨍한 아스팔트 위 달팽이를 음지의 이끼 위에 놓아주는 일처럼 근사한 일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대체적으로 비밀은 남루하고 가난하니까요.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비밀을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그것은, 견딜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비밀은 자신에게 드리는 예배 같은 것이거든요. 나, 목적 없는 비밀을 갖고 싶어요. 그것은 하루 종일 빗줄기의 개수를 세는 일이거나 구름의 방랑을 응시하는 일. 우물이 키운 모래알이 사막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일. 그래서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눈을 갖게 되는 일.

 

- 계간 『신생』 2012년 겨울호 발표

 

 


 

 

김도언 시인 / 고해성사

 

 

 나는 20세기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풍문들과 벌이는 성스럽고 합리적인 방탕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는 21세기에 죽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더러워져서 최후까지 감추려 했던 자부심의 노골적인 적막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는 이토록 성실한 죄인이 되어 가장 고전적인 용서의 소비자가 되었습니다.

 

 


 

 

김도언 시인 / 어떤 방에 대한 기억

- 신동옥에게

 

 

우리 집에 수줍게 세 든 뒤

7년을 함께 산 시 쓰는 신동옥,

나는 그 기이한 이름을 가끔

'시인동옥'이라고 늘여서 발음해 보곤 했다

그것은 언제나 내겐 좀 벅찬 일이었다

동옥은 며칠 전 새벽에

자신이 살던 옛집에 유령처럼 들러

그가 살던 방에서 글을 쓰고 있던 내 아내에게

장미 한 송이와 아이스크림을 건네더니

형에게 전해 주라고 했단다

나는 그 시간 깊은 방 이불 속에 웅크리고

비몽사몽간에 아래층에서 들리는 어떤 사내의

몽롱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시인인지 강도인지 아니면, 아내의 정부인지

나는 밤마다 도지는 깊은 병에 자발적으로 피랍되어 있었다

피랍된 자가 기억을 찾으러 온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동옥은 열심히 잠도 안 자고

최선을 다해 밥도 안 먹고 체중이 자꾸 줄어도

술만 마시고 지극히 두껍거나 지극히 얇은 책만 읽었다

그리고 날마다 자라나는 술병들을 치웠다

그의 마른 몸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뼈아픈 상상력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매우 너그러운 상상력의 공여자였다

그의 몸에 대해서 조금만 더 말하자

만약에 그가 여자였다면,

나는 그 몸의 볼륨을, 그 볼륨의 결여된 은유를

탐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동옥은 오직 결핍만이 풍요로운 자였다고 진술해야 한다.

나는 그의 집주인이었으니까 이 정도의 자격은 있다

그는 아침 햇살이 창턱을 넘어오면

함정 같은 방을 나와,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핀 곰팡이를 툭툭 털고

책 한 권을 들고는 집 앞 산 속으로 자주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석양빛이 이슥할 즈음

허기를 채운 맹수처럼 천천히 걸어서 돌아왔다

그가 세간을 거두어 떠난 뒤,

나는 그의 빈 방에 가급적 내려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조금도 알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모르면 좋을 것들이 존재하는데,

나는 이것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믿는다

달포쯤 뒤, 술김에 들어가 방 한 가운데 섰다가

손이 먼저 장판과 벽지를 뜯어보니,

거기 잘 발효된 누룩의 언어들이, 정신의 비늘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깊고 푸른 대기 속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주인을 찾아가는 먼 길인지도 몰랐다

 

 


 

 

김도언 시인 / 졸 시

 

 

이름 없는 시인이

허름한 왼손으로

횟배를 앓는

늙은 개의 고독을 묘사하는 동안

아무도 행복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음을 알리던

우체부는 은퇴를 하고

노인들은 천식약을 사기 위해

약국 앞에 긴 줄을 서고

부자의 어린 아들은

중세 영어를 배우고

꽃비는 그래도 쏟아지는데

어쩌자고 당신은 아름다워서

가난한 노동자는 설탕과 소금을 먹고

오늘 하루는 자전거 바퀴처럼 서럽고

이 세계는 폭설에 에워싸인

복숭아밭처럼 외로워졌구나.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 2023.01.10

 

 


 

 

김도언 시인 / 권태주의자

 

 

나는 권태주의자야,

라고 말했을 때

애인은 남미에 가고 싶어,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어려워

권태주의자의 미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왼쪽에

농담주의자의 아래쪽에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열등감은

창문 위쪽에 화분의 오른쪽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터벨트를 채우고

애인이 회물차를 타고 떠날 때

은퇴한 아버지는

성장한 딸의 관능이 불편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조차 알 수 없다고 말할 때

술집에 모인

우스운 사내들의 성욕이나

빚을 갚지 못하는

부흥교회 목사의 우울은

자만심 강한 시인에 의해

함부로 묘사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거울 앞에 당도한다

거울이 절벽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쯤은

시민들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내가 힘껏 울었던 흔적을 지우고

나는 권태주의자야, 라고 말했을 때

언제나 세상은 소란으로 가득찼다

그 소란의 중심 속으로

가터벨트를 채운

애인이 스며들어간다

폭우를 피하는 습관적인 개처럼.

 

 


 

 

김도언 시인 / 편견에 의하면

 

 

내 편견에 의하면,

밤하늘의 별은 가슴 속에 파묻혀 자라는

장기의 일종이고,

고양이는 동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닌

동사의 어근이야, 따라서 해부학 교실에서는

필히 밤하늘의 별을 다뤄야 하고,

국어학자들은 '고양이하다'라는 동사의 기본형을

국어사전에 등재해야 한다고,

오케이?

 

 


 

 

김도언 시인 / 그리운 비행기

 

 

희망도 없이

절망도 없이

비행기가 날아간다

동쪽에서

심장 쪽으로

글쎄 도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사내의 머리 위로

거대한 비행기가

날아간다

초등학교에서

보건소 쪽으로

그건 네 생각이야

우리에게 미래가 어딨어

전화통화를 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진다

비행기는 심장 쪽에서

침묵 방향으로

기수를 돌린다

날개가 힘차게

바람을 가르자

걸인의 머리칼이 날린다

저 비행기는

추락과 착륙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추락은

단 한 번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구멍 뚫린 심장이

지나간 비행기의 체온을

그리워하는 동안

두 번째 비행기가

천천히

날아온다

 

-시집 <가능한 토마토와 불가능한 토요일> 에서

 

 


 

김도언 시인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  소설  『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악취미들』 『랑의 사태』 등.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꺼져라 비둘기』 등. 경장편소설 『미치지 않고서야』 등.  2012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권태주의자> <가능한 토마토와 불가능한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