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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시인 / 싸움에 대하여
누구나 낯짝의 반도 보여주지 않는 싸움을 가지고 산다 개 짖는 소리 창을 할퀴고 턱에 꺼칠하게 수염 난 남자와 한바탕 싸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싸움은 독 안의 물처럼 차오른다는 것을
방금 끝난 싸움을 여치울음인 듯 발끝으로 툭툭 차며 고수부지 유원지를 걷는 밤 평생 싸움꾼이던 아버지가 파종한 주름을 이랑처럼 경작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느닷없이 눈가에 고이는 늪 싸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싸움을 부른다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악을 쓰면 쓸수록 물이 꽉 찬 독처럼 싸움은 터져 나와 푸른 날(刀)처럼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하현달 같은 싸움을 고수부지에 내려놓고 돌아온 날이면 어느새 탁자 위엔 그가 켜놓은 촛불 아래 드러나는 순한 흙, 그러나 이내 차오르는 물의 경계 누구나 물고기 비늘처럼 살랑거리는 싸움 하나 품고 수면 아래서 물의 신민이 되어 사는 것이다
강지희 시인 / 유채꽃
허리 주춤주춤 세우고 인적 드문 반월성 기슭 돌아 나오는 낯선 바람 흐드러진 향으로 슬쩍, 발목 걸어본다 둥근 날개 허공으로 밀어 올린 흰나비처럼 아찔한 내 몸 위로 화들짝 누워버리는 사내 모가지 꺾고 하루쯤 엮이고 싶은 것이다
오래 그리워하다 꽃이 되어버린 봄날
건네고 싶은 말 있는 듯 꽃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고분처럼 미동 없는 얼굴 하나 저 바람의 목덜미 잡고 깔깔거리는 돌담 닮은 아이 서넛 퍼질러 낳았으면
강지희 시인 / 저녁 무렵 가창오리떼
꽃이 핀다 물결처럼 핀다 저토록 출렁이며 떼를 지어 핀다 갯마을 너머로 스러지는 일몰의 배경 나는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갈대 한 송이 꺾어보지만 바람은 단 하나의 얼굴을 잃어버린다 수면 위로 떠내려가는 저녁의 풍경 아찔한 현기증에 새들은 제 그 림자를 물고 구름까지 날아간다 새들이 닿는 곳은 허공의 뒤 켠 잠시 흔들리는 파문에 어깨를 기대면 왁자지껄 피어났다 스러지는 저 쓸쓸한 소멸 어느 날의 이별처럼 가창오리 떼가 날아오른다
강지희 시인 / 즐거운 장례식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 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수의壽衣위에 한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암癌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강지희 시인 / 지프니 타다
낭만적인 은색 지프니 동그란 소년의 눈망울 매달고 달리는 막다른 골목 맨발의 아이들 손을 흔드네
집들은 낡은 영화 세트장처럼 허름해서 반나절 공중을 선회하는 바다새 대신 뚫린 창으로 너를 기다리는 눈먼 내가 스치네
황혼에 널어놓은 빨래는 조용해서 초대받은 손님처럼 바깥 구름은 느긋해질 수 없다며 기댈 어깨를 내어주네
서 있는 것이 모두 정류장이 되는 저물어가는 톤도*의 땅에서 시계를 버리고 가방을 버리고 속눈썹을 버리고 단맛에 길들여진 혀를 버리네
흔들리는 야생에게 탈탈 털어낸 희망마저 돌려주고 지프니 심지의 촉 점화를 위해 부르릉 나에게 시동을 거네
*필리핀 빈민가
강지희 시인 / 물푸레나무의 겨울나기
뒷산 길섶 물푸레나무 잎 다 떨군 가지들이 자잘한 뿌리 같다 저마다 눈을 달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촉수들 겨울을 견디기 위해 나무는 뿌리를 지상으로 밀어내고 동면하는 짐승인 양 잎들은 땅 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젖은 뿌릴 햇살에 널어 말리는 동안 저쪽 안부가 궁금한 제 우듬지를 땅 속 깊숙이 내려놓고 칭얼대는 어린 새순에게 그렁그렁 젖을 먹이며 사슴벌레 쉬었다 갈 그늘을 짓고 개똥지빠귀 둥질 어디에 앉힐까 궁리하는 것이다 이윽고 기다리던 봄비들이 물조리개처럼 마른 숲을 적시면 공중의 뿌리들은 재빨리 땅 아래로 내려가고 잎들은 천천히 지상으로 걸어 나와 공중의 빈 곳을 채우는 것이다 껍질을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푸른 피 한 바가질 쏟아 낼 것 같은, 뒷산 길섶에 거꾸로 박힌 내가 서 있다
강지희 시인 / 항아리
이것은 옛것이 되기 위해 날마다 죽는다
이것은 구수하고 정겹고 따뜻하고 고색창연하기 위해 시간을 숙성시킨다
이것은 효모로 시작해서 발효로 끝난다
안기는 모든 것들을 심장에 집결시키느라 변두리보다 중심이 더 크다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보다 왜 살아야 하느냐를 고민한다
그럴 때 햇살과 바람은 그의 밀교이다
이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나열하다가 주관적으로 통합해 응축시키지만 일정한 음정과 여운을 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것은 세계를 회의하면서도 세계를 성찰한다. 천천히 그리고 둥글게
강지희 시인 / 러닝머신 위의 얼룩말
러닝머신이 달린다 50분 타임 위에 구름처럼 올라선다 가볍게 워밍업이 시작되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아침 7.0 스피드는 내 다리를 빠르게 굴린다 50분 충전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구름처럼 살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덜컹거리는 내 안에서 히이잉 얼룩말 한 마리 튀어나온다 나이로비 정글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희고 검은 띠의 목덜미로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닥을 걷어차며 질주하는 엉덩이 뒤로 어디서 나타난 원숭이들 따라오고 가끔씩 사자의 울음소리도 쫓아온다 간밤의 어둠을 묶어둔 포장마차 몇 지나 주걱부리 황새가 내려앉은 물가엔 먼저 도착한 동료들 그래 너무 늦게 도착했네? 어쩌구 서로의 슬픔을 묻는 동안 달리지 못한 시간들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러닝머신이 멈추자 죽은 속도가 나를 죽은 아파트에 내려놓는다 얼룩말 한 마리 엉거주춤 내 안으로 황급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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