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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심 시인 / 참선하는 바위
겨울 바이칼호수에는 얼음기둥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 참선하는 바위가 있다는데요 세찬 바람이 얼음호수를 미끄러지다가 바위를 만나면 끌어안고 휘돌며 주변을 깎아낸 후 바위만 우뚝하니 올려놓은 거래요
모래바람에 옆구리 파먹힌 삭사울나무처럼,
그러고 보면 참선은 삭사울나무나 바이칼 젠(Zen)처럼 극한의 뜨거움이나 차가움을 깔고 앉는 것
머지않아 고비사막과 바이칼호수에서 구루가 탄생할 것이라는 말,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닌 듯해요
-시집 <그래서 정말 다행이예요>에서
안현심 시인 / 남방큰돌고래
해적선에서 뛰어내린 아리온을 업어서 살려냈듯이 놀이도 끼니도 포기한 채 새끼의 주검을 띄워 올리지만 자꾸만자꾸만 미끄러지는 아가야 포기할 수 없는 어미의 노랫소리 들리지 않느냐 돌기를 빛나게 하는 음유시인의 노래, 리라를 타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느냐 숨을 쉬어라 내 아가야
안현심 시인 / 삐딱하게 보기
지구가 23.5도 기울어 바람이 불고 사계절이 있듯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네 발꿈치 보인다 바로 보았을 때 둥그렇던 얼굴이 올려다보면 파르르한 코스모스 고요한 뜨락에 엎드린 바람자락 보이고 참나무 껍질 속 사슴벌레가 보인다 삐딱하게 보기, 기울어져 보는 것은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내일을 생성하는 것 황무지에 배롱나무 한 그루 키우는 것
안현심 시인 / 눈표범의 꼬리
저기에 한번 휘둘리면 벼랑으로 날아가 납작하게 부서져버릴 테지만 그래도 휘감기고 싶다, 내동댕이쳐지고 싶다, 굵은 꼬리에 매달려 설산을 오르내리고 싶다 송곳니보다 발톱보다 매혹적인 꼬리에 나를 걸고 싶다 -시집 『아직 그 소년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
안현심 시인 / 안나푸르나
금강석처럼 빛나는 얼굴, 사랑의 화살은 단번에 심장을 관통하고 말았네 내 순수는 그대와 하나 되길 망설이지 않았네 군중 앞이거나 저잣거리를 떠돌 때도 오직 그대뿐 방랑벽은 돌올한 지성 앞에 무릎 꿇고 말았네 내면 깊은 호수에서 환희를 길어 올리는 안나푸르나여 그대를 만나지 못한 나날 들개처럼 떠돌았네, 바람둥이였네
안현심 시인 / 아버지의 쑥
달빛에도 목이 마르는 윤사월 봉분 마른 흙을 뚫고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애기 발가락, 피우지 못한 이데올로기가 짱짱한 쑥으로 돋아났네요 진달래 핏빛 물든 산자락에서 반듯한 이마로 잠든 아비여 이 쑥국을 끓여 먹으면 당신의 신념을 만질 수 있을까요 어린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꽃자루 한 마디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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