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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란 시인 / 가을, 누가 지나갔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
진란 시인 / 가을, 누가 지나갔다

진란 시인 / 가을, 누가 지나갔다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진란 시인 / 봄, 모종

 

 

갔다. 그는 오고싶으면 왔다가 금새 가버린다

하고싶은 말이 하도 많아 전화기를 들었다놨다

눈 앞에서는 속내 드러날까 눈길을 피하는데

왜 또 무슨 상상을 하길래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튕기는구나

새로 옮긴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느라

나름 애간장 조이며 사는 것이더냐고

바람만 건듯 불어도 밤새 뜬눈으로 지새는걸

네게로 가는 신호음은 부재중이고

잔뜩 부은 눈두덩이에 실핏줄 선 마음을 넌

 

그래, 너도 더 살아보아라 꼭

요담에 너만큼만 길러보아라

봄바람에 가방도 잃고 술에 쓰러져잤다는 말

네가 간, 그림자 뒤에 오금오금 파고드는 진자리

속곳까지 젖어버리는 빗물에 봄은 피어나겠지

환한 햇살에 마른 자리 버석거리는 실어의

흙두엄, 그 봄빛 속에 너는 오고싶으면 왔다가

가버리는 짤막한 해후, 그 막연함을 아는지

 

 


 

 

진란 시인 / 그 여자가 있는 풍경

 

 

여러 해 묵은 가지의 틈을

헤집는 돌개바람

탄력을 잃은 목선의 주름진 고랑 사이

밤새 웅웅거리던 귀울음 앉은 딱지에서

하나씩 비집고 나오는 매화 꽃잎들

눈 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다

저렇게 핀다는 것은 독한 짓이다

생살을 찢는 일이 그만 있었겠는가!

폭설의 냉골에서도

남보다 먼저 치맛자락을 펼쳤길래

철없는 햇살에 자궁을 열고

검푸른 마음 한 켠에 열매를 가지는 것이다

 

햇살 한 줌 부둥켜안고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있을

그 여자, 꽃구름 같은

 

 


 

 

진란 시인 / 텅 빈 들판

 

 

멀리에서 바라볼 때의 들판은 비어있는 것 같아

들판 가운데 서서 하늘을 보거나 발밑을 보면, 거기

가득가득 너희들이 너무 많아,

그 속에 서로 부대끼면서 말이지

그런데도 똥일까, 토끼일까,

그 생각이 자꾸 숨이 차

쉬어가는 쉼표처럼

 

 


 

 

진란 시인 / 나를 여의다, 구월, 가을이었다

 

 

구월이었다.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않고

양사장은 생에 취해 꽃그늘 깊은 잠에 들었다

늦도록 피어있던 장미 덩굴들이 숨죽여 바라보았을 때다

여리고 마른 몸은 고치처럼 오그라들었을 게다

한껏 그리던 하늘에 그가 고르던 말로 절을 하나 짓고

훠얼 염화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홀연, 나비 한마리 시인의 꿈으로 몇 번 돌아서

날으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다

 

가을이 사람들을 헤집으며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 사람을 보았느냐고, 당신 죽었다는 소식 들었느냐고

늦게사 받아든 내 부고장, 사람들의 발치에 채여

철이른 단풍잎 하나 길 위에 뒹굴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던 이들이

소리죽여 깔깔대느라 나뭇잎을 놓쳐버렸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나를 간지렀다

죽었다는 게다, 나비는 아니었다.

내 죽음을 울고 싶으나 울음이 터지지 않는,

 

무명의 시인인 내가 죽었다는 기별, 슬픈

얼굴로 와서 잠깐 조의를 표하고, 바삐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등 뒤에서

소슬거리는 바람으로 오래오래 손 흔들던 꽃잎

그를 여의고, 나를 보내는 구월이었다는 게다

 

 


 

 

진란 시인 / 훌쩍, 가을

 

 

오늘 하루 무슨 일 있었느냐 묻는

너는 오늘 하루 무슨 일 있었느냐

내 마음이 어떠냐고 묻지 않는 너를

가슴에 다 묻어놨더니

나오는 말마다 가시가 돋았다

 

내일은 이 가슴에 염증 나는 것들을 죄다

폐기해버릴까 보다

밤마다 그 생각하다 눅눅해진다

하필 왜 너인가, 가위 눌리는 꿈들

오다 마는 시의 고백들

 

그래도 좀 더 가 보자

그래도 좀 더 나를 참아 눌러놓자

그렇게 나를 이겨내는 일이

가장 무겁고 자지러지는 일

 

가을이 쉽게 오고 가볍게 훌쩍 간다 한들

겹겹이 쌓인 현기증에 훌쩍 적셔진다고 한들

병색이 깊어 입술을 훌쩍 숨겨버린다 한들

 

 


 

 

진란 시인 / 후박나무의 푸른 허리쯤 숨어 건너다보는 일처럼

 

 

허공을 북북 그어대면서 비가 왔다.

오른쪽 귀를 나무에 대고 왼쪽 귀는 바깥의 숨을 더듬었다

후끈한 수피와 그 바깥을 가르는 차가운 소리

세상의 지붕처럼 뒤덮고 있는 잎사귀가 소란해지다가

내 가슴께에서 종소리가 출렁거렸다.

불현듯 울음이 차올라, 저 빗길을 흘러가

남해 어느 바닷가에 닿아 공룡처럼 발자국 찍어놓고

남해 깊이 잠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유쾌해진다

물고기들에게 먹히는 살들이 팔랑거릴 것이다.

문득 사라지고 없는 나를, 그래 나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찾는 소리가 명랑하다

유서는 써야 할까? 비밀스럽게 그냥 잠적해버릴까?

짜르르 왼쪽 심장에 경고음이 울렸다

빗소리에 방전된 비명들이 날아올랐다

시나브로 푸른 그늘을 지우고 세상의 모든 구멍을 채우려는 듯

어설픈 지도를 만들면서 장맛비는 쏟아지고

점점 기울어지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헐렁해졌는지 싶게

기울어지는 구름의 중심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후박나무 넓은 잎을 조롱하는 듯 빗방울이 성기어지고

그 초록의 넓이에 미끄러지는 물방울들이 햇살에 쨍하다

태양 전열판이 되어버리는 아스팔트에 훅훅 네 숨이 찼다

비릿한 비 냄새를 털면서 푸른 잎사귀들이 깃을 세웠다

바다에서 막 돌아온 초록물고기들이 가오리연처럼 생생하게 흔들렸다

내 가슴에 북북 그려진 먼 얼굴도 잎사귀를 털고 뛰어내렸다

세상 어느 구멍에 숨었다가 물떼를 만났던,

퉁퉁 불었던 먼 그리움 몇 마리 햇볕에 자지러졌다

후박나무 허리쯤에 숨어 사소한 죽음을 보았던 날이다

 

 


 

진란 시인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유아교육학과 졸업 및 신학대학원 졸업.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혼자 노는 숲』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계간 『주변인과詩』 편집장과 월간 『우리 詩』 교정위원 역임. 현재 계간 <시와소금>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