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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서 시인 / 새가 가자는대로 갔다
길라잡이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래를 설계한 투시도를 펼친다 쉬지 않고 폐달을 밟았다 불흑의 능선을 건너갈 무렵 마녀 사이렌이 리라를 뜯는다 달콤한 선율에 취해 탈탈 털리고 주변인으로 떠돌았다 파도는 끝없이 뒤척인다 파도는 포세이돈의 상징물 삼지창을 휘두른 파장 수평선은 올림퍼스로 가는 실크로드였다 썰물이 들이오고 나간 자리에 의흑이 들어온다 의혹이 망상을 낳는다 메마른 모래밭에 초록색 종이를 뜬어 붙인다 바다의 요정들이 춤을 춘다 등대에 새겨진 예언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석회질이지만 예언은 신의 영역, 예언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 비둘기가 볍씨를 물고 돌아왔다
-시집 <새가 가자는대로 갔다>에서
김명서 시인 / 농담과 거짓말
갑판 위까지 튀어 오른 해맑은 웃음소리 먹구름에 가려지고 파도의 인력권에 갇힌 배 골판지처럼 구겨진다 "소란 피우지 말고 지시가 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세요." 안내방송이 객실의 통로를 막아선다
아이들은 조류의 흐름으로 침몰의 속도를 가늠한다 육체를 벗은 그림자들 해무에 부딪쳐 유빙처럼 떠다닌다
"반드시 그림자를 찾아서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웬디의 약속 꼬리가 잘린 무뇌충이었을까 청기와 용마루에 극소량의 소금기로 말라간다
높이 쏘아올린 조명탄은 씻김굿 하듯 허공에 포말을 긋는다 바닷새들 서럽게 웃는다
수면에 움푹움푹 찍힌 발굽 야욕의 기운이 서렸다 검은 제국의 술탄 후크 것인지 아무리 하소연을 하고, 아무리 회유를 해도 무심하게 저인망 그물을 던진다
그림자들은 낡은 그물을 빠져나와 생이 부활하는 엘리시온을 찾아 나선다 검은 섬들이 해풍을 몰고 와 바닷길을 막아버린다
기억을 잃은 아이들은 네버랜드에 사는 것 지금쯤 피터팬에게 헤엄치는 법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 야만의 사육제, 한국문연, 2016
김명서 시인 / 유리병 속의 혀
X의 친절에는 독이 숨겨져 있었다
못질 한번 없이 진리의 집을 짓는 성자의 모습에 발을 들여놓고, 줄기차게 떠들어대던 상생과 정의 의로운 언어 뒤에 숨은 혀로 살생부를 찍어낸다
나의 둥지에도 복화술 암호를 심어놓고 한물간 정보와 낙서까지 해킹해 갔다
금간 감정선을 땜질하고 우그러진 곳을 펴보려 했으나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불신은 불안으로 뒤바뀌고 더욱 캄캄해져만 가는 대낮 햇빛을 찾아 더듬거리는 내게 X가 쓴 독설이 환상통인 듯 늑골을 파고든다
X는 훔쳐낸 정보를 망상의 페이지에 끼워 넣고 화려하게 각색을 하고 날개까지 달아놓았다
진원지를 떠난 소문에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소문이 지나간 허공에 뒹구는 허구의 입자들
한 번쯤 자신의 궤적을 돌아봐 도대체 어떤 악령을 섬기는지 더는 그르치지 말기를
X는 유다의 후예라서 그렇다고 변명같은 고백을 웅얼거리는데 말꼬리 사이사이 탈바가지 웃음이 언뜻언뜻 피어난다 뜻모를 연민이 소용돌이 친다 그러나
혀가 없는 목소리에서 악취가 난다
김명서 시인 / 바람새
자유, 어디에 있을까 새장 밖 또 다른 함정이었다 내 안에 바람이 분다 더 큰 바람 앞에 선 나는 나에게 가장 먼 존재 내안에 늘 아픈 바람이 불었다 나는 나에게 가장 낯선 존재 처음부터 타인이었을 것이다
김명서 시인 / 절대적 고독에서 벗어나는 방식
우랄산맥 너머 거인족이 사는 왕국이 있다 거인족이 모든 바람을 다스린다 북서풍이 진군할 것을 예측한 숲은 동면에 들어간다 외부와 단절된 그 세계는 무중력이다 상록은 파수꾼 역할을 자처한다 집단행동에 들어가면 저항하는 쪽은 가수면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르핀과 불면은 상극관계 동면을 동안거로 생각한다 거우내 묵언 수행하고 하늘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 순리 경칩 지나 마른 가지에도 생기가 돈다 꽃과 고통은 이음동의어 꽃이 핀다는 것은 죽음을 예측했다는 것 돌맹이도 극도의 위협을 직면할 때 새끼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우랄산맥을 눈앞에 둔 바람이 대오를 풀고 한바탕 분탕질을 한다 관목들은 고열과 신음이 밤낮을 산고를 치르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김명서 시인 / 새점
역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균열이 생겼다
하루를 새점으로 연다 십자매가 조롱에서 물어낸 점괘는 '영생불사'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시도한 점괘는 '불로초' 마왕의 명부에 명줄 잡힌 불치도 낫게 한다는 효능에 별표를 추가하고
점괘를 따라가려니 목덜미가 떳떳하게 거부 반응을 보인다
창백한 문장들은 뜬구름에 젖은 풍문을 끌어안고 길을 편집하고 있다
길은 길 위에서 찾아야 하는 것
구름산 상봉 불새들의 본거지에 불로초가 군락을 이룬다는 신화와 전설을 끌고 다니느라 다리가 질질 끌린다
협곡과 악산을 오르고 올라 손이 약초에 닿으려는 순간 불새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든다
김명서 시인 / 사막의 춤
뼈대만 남은 사원, 포연 속을 돌아 나온 제사장 신성한 번제물을 바치고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신을 찬양하는 목소리 가늘게 떨고 있다. 치사율이 높은 화생방전을 별일 것이라는 잔인한 소문에 방역을 한다 소문은 가지치기를 할수록 더 무성해진다 군홧발에 짓이겨진 소녀의 실루엣, 모래언덕에 올라간다 번제물을 태운 흰 재를 손바닥에 올린다. 어린 양의 애처로운 울음이 부활한다 집짐승들도 생리가 끊겼다 부르카에 붙어 다니는 금지된 계율을 잘라버리고 알라 알라 알라신을 부른다 벙커로 숨어든 램프 불빛은 입덧하는 병실을 지키고 있다. 국경의 장미는 두 얼굴을 가졌다 철조망을 넘어갈 때면 분칠한 웃음을 몸에 바르고 야릇한 배꼽춤을 춘다 난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세상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엎어지고 포개진 죽은 몸뚱이들, 아낌없이 대지에 되돌려 주는지 짐승들과 미물들까지 불러들이고 들꽃들은 붉고 흰 만장을 흔들어 애도를 한다. 사막은 불의 바다 먹이사슬 꼭대기, 거인국들 크고 작은 전쟁놀이를 즐긴다. 소인국들은 마리오네트인형처럼 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전쟁의 서사도 저들의 기호에 맞게 전쟁의 잔혹성을 미화하고 신화 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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