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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 시인 /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떠나간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여름날 풀벌레 울음소리도 스산한 들녘에선 더욱 그립고 그리운 것은 늘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운 것은 그때 놓친 열차다 그 후로도 열차는 기적을 몇 번 더 울렸지만 나는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통학에서 통근으로, 이제는 승용차로 출퇴근하지만 아름다움은 추억으로만 추적거릴 뿐 내게 더 이상의 기적은 울리지 않는다 오늘 토요일, 수원행 막차로 돌아오는 우중 길 그때도 비내리는 토요일 경주행 막차였다 딱 하나 비어있는 빈자리 옆, 수학여행 준비물 챙기러 귀향한다던 그 단발머리 쑥스럽게 교과서나 만지작거릴 때, 거기 청포도를 읊어보라고 조곤조곤 다그치던 하얀 교복 불룩한 가슴에 숨겨둔 이름표도 꺼내보이던 그 스스럼없던 눈망울이 지금 비내리는 차창에 그때처럼 어룽거린다 놓친 열차는 언제나 아름답다
* 올리히 렌츠, 「아름다움의 과학」
정호 시인 / 은유의 수사학
아무리 포위하고 수사망을 좁혀 들어가도 은닉한 장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젠 눈마저 침침해진 것인가 줄글마다 얼굴 빼꼼 내밀곤 하더니 마감일 바로 코앞인데 나타나지 않는다 놈이 벌써눈치를 챈 모양이다 놈을 수사하려면 공모함부터 찾아내야 한다 약속이나 한 듯 같이 다니지 않으니 분명 서로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촌철살인의 함축과 생뚱맞은 비의가 날치는 시동네에서 봄바람처럼 문장골짝 깊숙이 파고들어 글나무에 꽃도 피우고 잎도 틔우는 직유와 봄눈 녹듯 감쪽같이 행불된 은유.
정호 시인 / 시구문
둘레길 벗어나 원효봉 향한다 선발대는 벌써 시구문을 지났다는 카톡이 온다 詩句文이겠거니, 명필의 필치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거나 어느 문장가의 싯귀 하나 암벽에 들러붙어 있을 법한, 아니면 반정으로 겨우 도망쳐 나온 어느 왕족이 복귀를 꿈꾸며 호시탐탐하던 時求門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侍龜門이어서 거대한 거북바위 하나 계곡 암반에 엎드려 있을 것 같은
詩句 時求 侍龜 다 아니라면 始球는 절대 아니겠고 枾九, 市區, 혹시 뻐꾸기 산비둘기 많아서 鳲鸠門? 아님 누룽지 달라 꼬리치는 媤狗인가? 그도 아니라면 중성문 대남문을 비롯한 아홉 개의 문이 있다는 건지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마다 궁금증 하나씩 배낭에 주워 담으며 시구시구, 에라 얼씨구절씨구 땀 뻘뻘 도달한
시구문, 죽어서도 괄시받던 민초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던, 꽃상여는 못 탈망정 사대문 문간조차 편히 누워 나가지 못한 屍, 口, 門,* 나 거기서 한참을 서성이네 지례 짐작한 시향詩香으로 꽉 찼던 내 머리 느닷없이 소슬바람에 스산히 떨어지는 명命 다한 단풍잎 몇 구軀의 시향屍香들로 어지럽네
* 시구문(屍口門): 시체를 내가는 문
정호 시인 / 유금천 ㅡ유금천 12세(6월 ?일생), 직 립 좌 립 불 가
한마음복지원 베드로 방 독감 후유증 앓던 금천이가 떠났다 뿌리박은 나무처럼 방바닥에만 들러붙어 있더니 ㄱ자로 꺾인 한쪽 다리 끌고 저승 문턱 용케도 넘어갔다 종일 누워서만 지내 납작바위가 된 뒤통수 장작개비 같은 몸 들어 올려주던 티 없이 싱글대던 눈 그에겐 보고 듣는 것 외엔 모든 게 불가능이었다 연필 움켜쥐는 손도 입까지는 닿지 않았다 유월에 금천구에서 주워왔다고 성과 이름도 유금천으로 살다 간, 영혼, 하늘복지원으로 자리를 옮겼구나 거기서 바깥세상 두루 해찰하고 있겠구나 한 번도 내뱉지 못한 속엣말 신기한 듯 실컷 옹알이하고 있겠구나 다들 놀이방으로 몰려가고 난 베드로 방 채 치우지 못한 신상명세표가 올려진 옷장 그 아랫단 크레용으로 괴발개발 그려놓은 여자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는 텅 빈,
정호 시인 / 잠시
그것은 한편의 짧은 시 길섶 코스모스 꽃잎에 살폿 발 내딛다 날아오르는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 잠깐 앉았다 가는, 혹은 묵정밭 들머리에 엉거주춤 서 있는 망초꽃 대궁이나 몇 번 흔들다 형체도 없이 사라질 한 순간의 적요
아내와 한바탕 티격태격, 속마음 뒤틀리는 그래도 내 여자거니 스스로 달래기까지 마음 속 한 귀퉁이에 최신 버전으로 압축하여 시말로 녹여낸 한 순간의 이미저리
그 짧은 행간에 숨은 알레고리다 일상의 잡다한 인연들의 연속인 우리 살아가는 일, 때로는 잡혀 사는 일이 꽉 잡고 사는 일 그 길고도 오랜 메타포를 순간적으로 요약해 놓은 절묘한 터치이다 생각의 피륙을 짜는 씨줄이고 날줄이다 시도 때도 없이 귓전을 맴도는 잠언 같은 짧은 시다, 잠시란
정호 시인 / 죽령 옛길을 오르다
발발이 앞세우고 소백산 감아오른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게 덜덜거리지만 십년지기 등짝이 편해 실려 가는데 옛길 초입에서 놈이 기어이 어깃장을 놓는다 밤낮없이 혹사시켰다고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도리 없이 긴급출동 견인차에 앞발 들린 채 마을 간이진료센타로 끌려간다
놈의 완쾌를 기다리며 근처 설렁탕 집에서 내장에 기름 좀 치고 냉각수 벌컥벌컥 들이켜는, 나는 언제 엎어질지 모르고 뛰는 한 마리 토종견 좋으나 궂으나 헐떡이며 뛰어왔다 고질병인 늑막염으로 가끔 정비공장도 들락거렸다 어느새 육십령고개 넘는가 싶더니 속도는 갈수록 더욱 빨라진다 발발이도 주인 닮아 기관지가 취약한지 해마다 여름이면 에어컨 수술로 입원하곤 했는데 아직은 퇴물 될 날 멀었다며 자리 툭, 툭, 털고 거뜬히 일어난다 가던 산길 용케도 찾아 콧구멍 벌름거리며 달린다 몇 구비를 더 휘감아올라야 내 삶의 정상에 닿는가 칡넝쿨 도로 안쪽으로 뱀처럼 기어나오는 가파른 오르막길 덜커덕, 에어컨이 또 고장이다 얼굴에 훅, 끼치는 열기
앞뒤 차창 다 열어 제치고 킁킁대며 죽령 옛길을 오른다 피톤치드라도 맡으며 가란 듯 발발이 프라이드가 주인을 한껏 혹사시킨다
정호 시인 / 파천巴串
화양 제9곡 巴串에 이른다 계곡에 바윗돌을 주렴처럼 꿰놓은 듯하다 하여 巴串파천이라지만 땅이름 곶을 붙여 巴串파곶이라고도 하고 물줄기가 바위를 뚫는다 하여 巴串파관이라고도 한다
파천, 파곶, 파관, 어느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명칭이란 자존의 또 다른 이름일 터. 그게 구분만을 위한 것이라면 무슨 산이며 강 무슨 천이며 계곡이면 어떤가 불러주는 이름과는 관계없이 산은 제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았고 물은 제 갈길 쉼 없이 흘러간다 계곡으로 흐르다 제 분수에 맞게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된다
아명으로 별명으로 본명으로 필명으로, daum 카페에서 노닥거릴 땐 닉네임으로 Naver 블로그에선 또 다른 익명으로 불리는, 어느 것 하나 이름값 제대로 못하는 내 이름. 내 언제 서야 할 자리 찾아 산으로 솟고 물길 따라 낮은 데로 흘러가는 냇물이 된 적 있던가 그 물길 따라 흐르다 함께 어울려 출렁이는 강물이 된 적 있던가
문득 낯설어진 내 이름들이 巴串 너럭바위에서 물미끄럼 타며 굴러내린다 얼굴마저 생소한 내가 물길 따라 잘도 흘러간다 속절없이 찰찰찰
정호 시인 / 고매사古梅寺
조춘시早春詩 한 편 탈고되었다는 소식에 남도길 달려갔다 선암사 무우전無憂殿 돌담 아래 벙긋벙긋, 첫 줄부터 만개체滿開體로 반기는 문장들 봄 햇살에 행간이 눈부시다 얽히고설킨 가지마다 톡톡 튀는 언어의 질감, 농익은 유희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데 어떻게 소문 듣고 날아왔는지 먼저 온 독자들 문장 속 깊이 파고들어 받침까지 굴리며 잉잉대고 읽는 소리 육백년 비바람걸레로 훔쳐온 서가에 낭랑하다 작자와 독자가 한창 밀월에 젖는가 방금 읽고 넘긴 한 페이지가 팔랑, 돌담을 넘어간다
* 古梅寺 :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절
- 시집 <비닐꽃>(북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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