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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시인 / 몸 안의 시간들
무릎 관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난다 다 보타진 냄비 바닥을 뜨겁게 훑는 소리
몸 안에서 몸 밖의 시간들을 먼저 읽는다
의식은 맑은 곳을 더듬고 다니는데 몸 안의 뼈들은 걸어온 흔적만큼 닳은 길을 내보인다
울타리 한쪽을 뜯어 쪽문을 내려고 용을 쓰다가 무릎 사이로 가랑가랑 물이 새는 소리를 듣는다
사는 일이 문을 내는 일인가 목숨 있는 것들이 하는 노역이 길을 내거나 길을 들여놓는 일인가
십삼 년, 병을 키우셨던 어머니 늘 문 쪽의 길을 보셨던 들고 나는 바람 한 쪽도 놓친 적이 없었다
정영주 시인 / 금목서 - 어머니를 보내며
금목서가 왜 쓰러졌는지 모른다 쓰러지면서 진저리치며 터지는 꽃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문득, 그제서야 오랫동안 내가 창문을 열고 뜨락에 나간 적이 없음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주인의 손을 타지 않은 나무의 목마름이 쓰러지면서 울음향기를 게워냈는지 모른다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거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라 비웃은 죄를 금목서는 자신이 자기를 베어 흘린 눈물의 전언으로 내게 건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한번도 심장 깊숙이 들여놓지 못한 세상의 깊고 축축한 것들 금목서 어느 날 주인도 돌아보지 않는 빈 정원을 지키며 지킴이로 세웠던 버팀목, 쓸모없이 커가는 제 하중으로 밀어버리고 바닥에 툭 목숨을 놓는다 어떤 시위일까 맨발로 뛰어나가 금목서 옆구리에 열손가락 깊게 넣고 아픈 향기를 맡는다 다 버리고 눕는 일이 그토록 독한 전언이라면 그 잘린 향에 감전된 채 내 갈빗대 옆으로 스러져 누워도 좋으리라 몸 던져 우묵히 패인 흙구덕 잔뿌리 모조리 일으켜 허공에 내던져진 짓무른 속살 피 뚝뚝 흘리는 황금벚꽃들이 이빨 덜덜 떨며 젖은 땅에 누워 차디찬 관의 즙을 짜는 구나
사랑이 사람에게나 나무에게나 버팀목이 된다는 걸 어디서 배웠는지 쓰러져서야 내게 가르치는 구나
정영주 시인 / 지구도 곧 휴업이라네요
별들의 방이 폐쇄 직전이라네요 애써 심지를 올려도 이내 스러진다지요 지구도 곧 휴업에 들어갈 듯싶어요 '세상이 왜 이래,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떠도는 이 노래가 전조증상일지도 모르죠 에코데믹이 끌고 온 팬데믹의 황당 그대 아시나요? 인공지능으로 원격조정 못 할 바엔 지구의 시스템이 계약을 초월한들 뭐 어쩌겠어요 마스크도 다 벗어 던지면 정당한 시위가 될까요 절대 공기는 우주로 다 달아났으니 자판기로 파는 공기는 언제까지 수명일까요 테스형은 노래일까요 혁명일까요 축제와 만남과 파티와 연대는 다 어디로 탈출했을까요 인간의 과욕이 남극과 북극까지 구멍을 내서 마침내 지구까지 터져버리겠지요 아, 카오스라고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라고 명명하고 싶은데 우리가 버린 타자의 시간에 시기를 놓친 나의 시간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싶은데 이 모든 게 가능은 할까요? 예수 형?
정영주 시인 / 달항아리
물어뜯고 달려들어도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지요 어르고 껴안고 쓰다듬어도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지요 알몸 뼛속까지 벌겋게 달궈져 골백번 혼절해도 이 앙당 물고 용광로 속에서 꽃불로 달궈져야 한다지요 천삼백 도의 불을 미동도 없이 흠뻑 받고 까무러지게 받아도 눈썹 하나 까닥하면 안 된다지요 얼마나 불을 먹으면 얼마나 불로 배부르면 달항아리가 제빛에 넋을 잃을까요 몇 천 번의 기절을 보다 못해 어느새 불구덕으로 굴러 들어간 달 하늘은 까마귀 날개보다 더 검게 펄럭이고 하루 밤새 꼬박 불 지펴도 애먹이는 가마 달래려고 굴러 들어간 달은 언제 항아리에 제빛을 발라 주고 나오려는지요 온몸에 은근히 달빛이 흘러넘쳐야 달항아리 아니겠냐고 사내는 봉통문 꽉 닫고 연신 장작을 쑤셔 넣습니다 굴러 들어간 달과 가마의 불과 항아리와 사내가 뜨겁게 한 몸이 되는 일 오늘 가마 속, 저 절대 사랑은 하늘의 일이겠지요
정영주 시인 / 바다에선 몸이 사유다
바다를 등지고 해가 진다 지는 해 그림자를 차근차근 파도가 먹는다 파도의 혓바닥이 목울대로 넘어올 때마다 자신 안에서 거센 물살을 본다 누구에게라도 그릉그릉 달겨들고 싶은 바다의 아가리 허연 이빨 속으로 자근자근 말려 들어가는 몽뚜엉리는 늘 거품이다 바다에 닿자마자 모래처럼 파삭 부서져버리는 단번에 분질러지는 죽음의 상징 찰나의 고통도 없는 저릿한 함몰의 쾌감이란 바다의 결기 속에 감추인 결코 해독할 수 없는 비밀의 심연 바다에선 몸이 사유다 불온한 온도로도 마주할 수 없는 청동빛 물갈기들의 난마 속에 숱한 말발굽 소리를 들을 때 거칠게 나를 뚫고 달리는 천마(天馬)를 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부서져내리는 장렬한 파열음들 모든 죽음과 삶이 동시에 주어지는
정영주 시인 / 뼈마다 눈부신
어머니가 지상의 길을 툭 내려놓으니 하늘이 대신 어머니 길을 간다 그러니 뼈마다 눈부신 것이다
손으로 어머니 마른 몸을 더듬으며 자식들에게 길을 내던 곳을 찾아 나선다 여기저기 허옇게 각질이 피어 있다 평생 어머니 몸은 염전이었다 맨발로 당신을 밟으며 수레를 돌리고 살과 뼈를 다 부숴 소금밭을 일궈들였던 방주 내 손바닥이 어머니 몸에 쑥쑥 빠진다 깊고 마른 뼈들의 골짜기
어머니는 마른 가시손을 자꾸 내젓는다 그 가시에 울컥, 목젖이 찔린다
뼈 마디마디 서늘한 맑을수록 추워져 어머니 뼈 속에 들어가 운다 나 또한 그 뼈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뼈였으니 골수에서 흘러나온 진액을 남김없이 받아 마셨으니
축축한 어머니 젖가슴에 손을 넣고 온기의 뼈를 찾는다 지상을 건너뛰며 어미와 자식을 갈라놓는 마지막 다리 가장 빛나는 돌을 찾는다
정영주 시인 / 거짓말할 수 없는 안부
안부를 잃었다 주머니에서 흘리기도 했고 길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안부를 그냥 무심히 지나쳐오기도 했다 안부는 제가 안부였는지 모르는 듯했다 대신 세상은 수시로 5G를 꺼내 안부를 날렸다 온몸 구석구석 정보가 되는 안부 잠수하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안부 서둘러 안부를 잃어야 자유 일 인분 섬처럼 얻을 수 있는 안부 1초도 닫을 수 없는 24기가 소통을 어디다 버려야 완전한 섬이 될까 1초도 숨을 수 없다면 몇 겹을 입어도 낱낱이 보인다면 온몸 구멍구멍이 다 안테나라면 복제된 내가 여기저기 출몰해 내 세포를 나눈다면
-시집, <통로는 내일모레야> 中에서
정영주 시인 / 종아리의 바다
섬이 되고 싶어, 말하는 순간 발바닥이 허공을 들어 올린다 보라색 옷을 입어야 천사의 다리가 문을 연다는 소문이 섬 주위를 떠돌고 있다 떠도는 섬과 만나 함께 보라로 뭉개지는 일이 가능할까
어릴 때 보라는 죽음의 색이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해는 보랏빛보다 더 짙은 블루나 잉크색 아비가 오징어 배에 오를 때 바다는 시커먼 먹물 빛이 되었다 아비의 폭언이나 사나운 낯빛이나 매질의 질량에 따라 바다 빛깔도 변덕을 부렸다 동해의 보라는 내겐 거무칙칙한 죽음의 보라, 피투성이가 된 내 종아리의 바다였다 여름이어도 검은 스타킹을 신고 양호실 구석에 처박혀 누워 있었던 묵호의 바다 검은 바람 속에 막걸리 냄새 무섭게 나는 날이면 바다 반대쪽으로 냅다 달아나 깜깜하게 숨곤 했다
긴 시간의 다리를, 그 어둠의 바다를 꿈인 양 멀게 건너왔다 또 다른 바다는 내게 무엇으로 다가올까 미리 문 닫아걸고 열쇠를 아예 잊고 있었는데…
서해, 그 느릿한 뻘 위로 천사의 다리가 출렁이며 온다 보랏빛으로 충만한 치유의 섬이라고, 보라색을 입어야 한다는 전언이 그럴싸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보라 꽃다발, 잔뜩 꺾어 든 누군가가 내게로 올 듯싶어진다 보고 만지는 것마다 보라의 마술이 펼쳐지는 모든 걸 잊게 하는 -시집 『달에서 모일까요』(상상인, 2025) 수록
정영주 시인 / 달에서 모일까요? ㅡ 지구의 숲
서너 번 저 붉은 방을 염탐해 본 적은 있지만 글· 쎄· 요 우주선에 황홀이 올라 계수나무 곁에 옮겨준다면 뭐, 아 아 글 쎄 요, 무엇으로 떡을 빚을지 모르는 토끼와 동거가 가능할지 좀 당황스럽긴 하겠네요 지구가 곧 폐쇄된다고 수상한 소문이 나돌긴 하는데 마스크도 이젠 진저리 나서요 바이오가 바이러스가 된 땅에서 답이 없으니 말이죠 더구나 숙주인 인간들, 제발 지구에서 떠나라고 강과 산이 피켓을 들었다는데 누가 시위를 부추기는 건지 태초의 계약이 부재여서 오염된 공기를 어디서 세척해야 다시 자연과 재계약할 수 있을까요 나라마다 죽음을 관장 못 하니 으 으 우 아 아 ~~ 전염의 공포! 담론만 폭발인지 달에서 모여 회의라도 하시지요, 지구인들! 우리가 망쳐놨다는 지구의 숲 책임을 전가할 기회가 있기는 할까요 -시집 『달에서 모일까요』(상상인, 2025) 수록
정영주 시인 / 칼끝의 미로
칼끝으로 문장을 헤집어 간다 낯설게 펼쳐진 불온하게 큰 책갈피 사이를 예리한 검객의 날로 한 장 한 장 예리하게 훓는다 낱낱의 글자가 피가 날까 숨긴 문자의 안내는 불길하고 수상하다 절묘한 칼끝의 미로 다치지 않고 시어가 내게 걸어올 수 있을까 꿈속에서, 깊이 감춰진 사유를 찾는 칼의 노동을 보았다 언질을 준 적이 없는데 그리 소중한 것은 베이는 것처럼 아리게 오는 것인지 칼의 전언처럼 그렇게 아슬아슬 피를 흘려야 내 것이 되는지 악, 입을 벌리고 눈 번쩍 뜨는 새벽, 아들이 놀라 문 잠깐 열어보는 사이 시어들이 내 횡경 막을 열고 터져 나온다 잃어버린 시가 비로소 칼끝에서 문을 연다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1월호 발표
정영주 시인 / 옥따비오 빠스가 돌멩이 연필을 건네다
입체를 뚫고 질량을 탈출한다 시간은 붉게 하늘의 오후를 떠메어가고 서쪽 능선 한쪽이 휘청이다 제자리 잡는다 영원한 것들은 일시에 속는다 속는 것들이 지금을 찰나에 잊는 일 잊을 때 터트려지는 말들은 대부분 황홀이어서 노래라 하지만 울음인 것들이다 불투명할수록 목말라서 백 가지의 색 가지고도 분별할 수 없다 허공에 사다리 하나 걸처놓고 싶었다 허벅지가 깨진 야곱*이 올려다본 사다리 탈출은 날다가 떨어지는 돌멩이가 아니라 하늘 몇 겹을 뛰어넘는 뜬 돌이라는 걸 옥따비오 빠스의 시집을 읽다가 '초석과 돌땡이의 오후'*에서 내 발목에 떨어진 돌에 놀란다 빠스가 보낸 연필 돌멩이! 무심히 집어 든 책 속에서 시 한 수 톡, 얻어맞을 때가 있다
●야곱: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꼽이 기도할 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 멕시코 시인인 옥따비오 빠스의 노벨상 받은 시 '태양의 돌' 중에서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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