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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선 시인 / 무릎의 역사
우연히 무릎을 굽혀 혀를 대 봅니다 비릿한 해변의 바람 맛, 나도 모르게 두 무릎 사이 얼굴을 묻고 태를 찢고 나오던 최초의 때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정수리에 불의 심장을 달고 달리는 프로메테우스에 관해 불우한 추억에 관해 아테나 여신께 묻는 대신 깊은 밤의 무릎을 베고 잠들겠습니다
아무르 강의 밤 산책길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을 어둠 속에 던진 이후 히말라야의 요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강가(Ganga)*에서 촐라체(Cholatse)까지 물구나무서기로 걷다 무릎대신 팔을 굽혀 혀를 대려다 말고 또, 우연히
불온한 정신의 팔꿈치를 생각하다 종일 사원을 쓸며 불평하던 인디오 여인의 앙상한 팔꿈치를 떠올립니다 강풍에 훅 날아가 버릴 바나나 잎 지붕 아래 빛나던 사두의 검은 눈빛
강가에 두고 온 상한 무릎들을 생각하다, 또 우연히 두 무릎을 감싸 안고 무릎 없이 걷는 길을 꿈꾸는 중입니다
-계간 『시인시각』 2012년 여름호 발표
김윤선 시인 / 내 무릎의 역사
우연히 무릎을 안고 혀를 대 보았네 비릿한 해변의 바람 맛, 나도 모르게 태를 끊고 나오던 때로 돌아가 무릎사이 얼굴을 묻었네 정수리에 불의 심장을 달고 달리던 프로메테우스와 불온한 핏줄에 관해 궁금해 하는 대신, 강물의 무릎에 기대 입술이 파래지도록 울고 싶었네, 아무르 강의 밤 산책길 아무르, 아무르 무릎들의 휘파람 소리
어떻게든 간절하게, 팔꿈치에 닿고 싶은 갈망은 해변의 사원, 종일 신전을 쓸며 루피를 벌던 인디오 여인의 앙상한 팔꿈치를 불러왔네, 바나나 잎을 엮어 얹은 남루한 지붕 아래 형형히 빛나던 걸인 사두의 검은 눈빛과 강가에 버리고 온 상한 내 무릎 한 켤레, 지워져가는 너의 세계 속 펄럭이는 회색코트, 보랏빛 새가 물고 날아가 버린 상한 탯줄과 푸른 달 속 사막을,
고아로 태어나던 어떤 순간에 대해 무릎 없이 걷는 길에 대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하얗게 지워지기로 했네
김윤선 시인 / 샤먼의 보라 -올훼에게
1 올훼,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카론을 유혹해서라도 레테의 강을 건너고 싶었어요. 해가 뜨면 모르는 낯선 사내의 신부가 되는데, 당신은 멀리서 태연하기만 하네요. 별빛 쏟아지던 측백나무 숲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약속 거짓이었나요. 어느새 당신의 수금은 새로운 그녀를 위해 울고 있군요. 스물 둘 꽃빛 목숨을 겨울 강물 속에 던질 때 연한 살 속으로 파고 들 수천의 바늘들, 아 너무 무서워요 어쩔 수 없어요 당신, 분명 후회할 거예요 날 잡지 않은 걸, 모두 즐거운 축제 전야 나만 혼자 울고 있군요. 밤이 서둘러 외투를 걸치는 소리 푸른 레이스를 끌며 새벽이 오는 소리 퉁퉁 부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샤먼들이 소곤대요. 싱싱한 제물이라며 음흉하게 웃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면도칼로 불길한 미래를 스윽 베어내고 싶었어요. 한사코 부서지는 몸을 끝없이 세워야만 하는 기나긴 악몽 속에서 날마다 당신을 원망해요. 몰약 같은 강물을 마시고 싶었어요. 늙은 카론을 달래서라도 돌아가고 싶었어요 멀고 아득한 그 곳, 당신이라는 보라 속으로
2 어제를 잊고 새로 뜬 해가 딩동 벨을 울리자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 사내의 팔짱을 끼고 가요. 반짝이는 가시로 짠 눈부신 드레스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속속들이 피가 맺히는 시간을 견디며 우아한 행진을 해요. 당신은 그 때 먼 숲에 있었겠지요? 바람결에 내 흐느낌이 유령처럼 떠돌 때 당신의 수금은 어디에 있었나요. 그렇게도 열렬히 원하던 현의 떨림을 잠재운 채 당신은 어디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고 있었나요. 할 수만 있다면 낯선 사내의 팔에 매달려가는 팔목을 잘라내고 팔랑팔랑 춤추는 나비가 되고 싶었어요. 가장 행복한 신부의 얼굴로 미소 짓는 순간에도 당신만을 열망했어요 오직 내게만 냉혹한 당신 누구이기에, 당신만이 그리운가요 수천 개의 가시가 박혀 곪아터진 환부에 꽃이 피려는지 긁을수록 자꾸 가렵기만 해요 어느새 싱싱한 새살이 돋기를 기다리는 일, 그건 너무 이른 일이겠지요, 올훼
3 사내의 턱에서 자란 수염이 끝없이 자라나고 있어요. 푸르고 빛나는 수염은 질기고 탐스러워 자르려 애쓸수록 더욱 무성해지지요. 쑥쑥 푸른 수염은 푸른 감옥이 되고 감옥에서 태어난 사내와 나의 아기들이 죄 없는 눈으로 엄마, 엄마 할 때면 가슴의 통증이 절정으로 달렸죠. 이제 당신께 가고 싶지 않은데 당신의 수금소리 듣고 싶어요. 사랑하는 올훼, 나는 그때 검고 깊은 레테의 강을 건넜어야 했나요. 꿈틀거리는 푸른 수염은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내 목을 조이곤 해요. 그에게 길들여져 날마다 쏟아지는 채찍에도 생긋 웃으며 감사해요. 길을 잃어버린 강물도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요? 단 한 번이라도 올훼, 당신의 수금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긴 수염에 목이 감겨 부러지더라도 바랄 게 없겠어요 사랑은 허공 위의 푸른 감옥, 오래오래 견디고도 날아가지않는
김윤선 시인 / 언어학개론
발화되는 순간의 의미가 대상과 합쳐지는 순간이 언어라고 소쉬르*는 말했다 랑그와 빠롤의 관계 사과는 사막이 아니므로 붉은 껍질 속 흰 몸 사막은 사과가 아니므로 모래바람 속이지만
사과도 사막이고 싶고 사막도 사과이고 싶고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때가 있지 출근 길 전동차 문을 박차고 나와 황홀한 가젤사슴의 무리를 따르고 싶어질 때가 있겠지
공원벤치도 사형실 전기의자도 되고 싶고 여자도 남자이고 싶고 남자도 여자이고 싶고 태양도 새벽 세 시의 달이 되고 싶어질 때 있겠지 진공의 어느 한 순간 로뎅의 그이처럼 턱 괴고 돌아 앉은 우주의 푸른 등을 볼 때 면,
날마다 불멸의 태양을 밀어내던 태양의 여신도 그만 자궁을 닫고 싶을 때가 있겠지 누가 다가와 바다여 라고 목 놓아 부를 때 바닥을 들어내며 물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를 바다 '너'이고 싶은 '나' '나'이고 싶니?'너' 즐거워라 랑그와 빠롤의 아이러니 왜이러니
*소쉬르: 프랑스의 언어학자
김윤선 시인 / 백석과 아버지와 피넛버터가 있는 꿈
끝 보이지 않는 긴 붕대를 왼쪽 무릎에 감으며 피넛 버터를 먹는 저녁, 낡은 병정구두를 끌고 백석이 오신다 나를 원망했느냐 시를 쓰게 했느냐 그리웠느냐 높은 슬픔과 시름의 진실 이제 알겠느냐 당신은 피넛버터를 바르기 좋은 식빵처럼 넓고 포근해 난 그만 아버지 등에 피넛버터를 발라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 가정환경조사서에 써 넣던 없는 아버지 흑장미 선배의 뺨을 치게 했던 아버지 끌려가 죽도록 맞게 했던, 바로 당신이란다 피넛 버터 속 아버지 피넛 버터를 바르는 아버지, 입 속의 아버지 이렇게 많은 당신이 다 내 것이란다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란다 피넛 버터를 사랑은 하고* 아픈 왼쪽 무릎은 무사하고 눈이 푹 푹 나리는 밤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와 나 고향으로 가는 길이란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변주함
김윤선 시인 / 커플
누가 보고 있는지 보더라도 개의치 않는 한 쌍의 새가 아침이면 포플러나무 꼭대기에 날아와 앉는다 스위트룸이라도 짓는 걸까, 애써 물어온 나뭇가지를 놓쳐도 서로 탓하지도 않은 채 다정하다 곧 봄이라는데 아직은 메마른 좁고 높은 저 끝에 의지한 채, 땅속 먼 뿌리에서 하늘까지 푸른 길이 열리는 소리, 듣고 있다 아예, 차 한 잔을 들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본다
참 오랜만에 사랑에 대해 써야 한다면 저 새들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 가을이 좋은 내가 벌써부터 봄을 기다려 어린이의 얼굴로 어린이의 노래를 한다 어서 어서 봄빛 스미고 새잎 돋아 무성해져라, 나무야 분홍 햇살 불러와라 구름아, 밤바람에 가랑가랑 흔들릴 하늘 아래 첫 집 저 높은 허공의 나라 지켜 주거라, 별아 너도
-계간 포지션 2019년 봄호 수록
김윤선 시인 / 회복실
86세 ‘황의숙씨’가 수술중이다 77세 김 모 씨도 수술중이다 65세 정 모씨가 수술중이다 54세 이 모씨도 수술중이다 고관절 골절로 수술중인 엄마가 최고령,
물끄러미 수술 중 사인을 보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어, 처녀 적 엄마 손을 잡고 파주에 다녀왔다, 금지옥엽 둘 째 애기씨 고향에서 알아주던 어여쁜 당신은 번번히, 무사하지 않게 슬픔의 재를 넘어 여기까지 왔다
내 슬픔의 대부분은 하찮거나 우스꽝스러운 것 낯선 이의 왼 손에 부주의하게 들려져 사정없이 흔들리는 들꽃의 불안과 날지 않는 비둘기, 얼음 속 물고기의 눈빛 뜻 없이,뜻 모를 흔들리며 흔들리는 무의미한 흐름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다, 조용히 습관처럼 또 흔들리는데
94세 기 모 할머니의 ‘수술시작’ 사인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86세가 되어버린 젊은이’가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는 ‘회복실 사인’이 깜빡거린다. 파란 입술을 떨며 손발이 묶인 채, 무의식속에서 깨어나는 엄마가 아퍼 아퍼 몸부림치며 운다
-계간 포지션 2019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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