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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영기 시인 / 잎이 지는 속도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박영기 시인 / 잎이 지는 속도

박영기 시인 / 잎이 지는 속도

 

 

 한 번의 색 한 번의 춤 한 번의 노래

 

 한 번의 무대

 

 한 번이라니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니

 

 붙잡을 수 없다니 내리며 녹는 눈송이라니 찰나라니

 

 아연이라니 피어나는 것이라니 각자 빛을 물고 빛을 뿌리며 나무가 느끼지 못하는 속도로 잎이 느낄 수 없는 속도로 남쪽에서 시작한 불이 북쪽으로 옮겨붙다니 한순간이라니

 

 이렇게 간단명료하다니

 

 우주가 만발한 꽃 한 송이라니 훨훨 단신이라니 지구가 목 떨어진 꽃이라니 끄덕일 목이 없다니 한 번의 부양 한 번의 착지

 

 이런 지독한 코미디라니

 

 단 한 번뿐인

 

 개운함이라니, 이런

 

 


 

 

박영기 시인 / 미끄러지는 오리

 

 

오리가 허둥거리며 빙판을 걷는다

허둥대는 악몽은 읽을 수 없다

호수 가를 돌며 손뼉을 치는 사람들

접었다 펴는 오리 날개는 읽을 수 없다

물 위를 날 듯 걷는 오리는 읽을 수 없다

자맥질하는 오리는 읽을 수 없다

부리로 물고기 쪼는 오리는 읽을 수 없다

오리 목구멍을 미끄러지는 물고기는 읽을 수 없다

오리가 들어간 수면을 센다

스물 스물다섯 서른 호흡이 꽤 길다

수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앞 문장에서 알 수 없다

오리를 삼켰다 음 파 하고 뱉는 수면

하루에도 수십 번 호수가 토하는 오리

수면이 토한 오리는 읽을 수 없다

어제 읽지 못한 오리는 오늘도 못 읽은 오리

오리 밖으로 미끄러진 오리가

오류에 풍덩

여태 읽은 오리는 모두 오리무중이다

오리는 오리를 더 미끄러져야 읽을 수 있다

빙판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악몽을 꾼다

 

 


 

 

박영기 시인 / 황조롱이가 왔다

 

 

집터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본다

아파트는 꼭 깎은 듯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귀를 열어놓고 말은 안 듣는다

눈을 뜨고 눈앞을 막고 서 있다 아파트는

현시現時를 현실現實을 못 본다

꿋꿋이 서 있는 게 서로 못마땅하다

승패도 안 나는 눈싸움을 밤낮없이 한다

눈썹도 까딱 않고 눈 부릅뜨고 싸운다

서로 한 치 양보가 없다 아파트는

흐르는 눈물로 뜨거운 눈알은 식힌다

거리유지를 고수하느라 밤낮 불침번을 선다

졸려도 깎은 듯이 서서 미동도 없다

아파트는 구십도 허리 꺾어 깍듯하게

인사 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 한다

고집이 황소 할애비보다 더 세다

멍청하기는 비교할 그 무엇이 없다

내가 눈 속으로 들어가 둥지 틀어도

말 한 마디 못한다 찢어진 입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다 아파트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깎은 듯이 절벽이다

발밑에 뜯긴 비둘기 깃털이 수북하다

내가 범인이라고 오해 받겠다

내일부터 화분에서 알을 품어야겠다

 

 


 

 

박영기 시인 / 이사 하는 날

 

 

대문을 열었다

 

사랑이

현실 앞에 머무니

무거운 마음 뿐

 

당신 흔적 하나 없는

남루한 빛깔

 

가슴으로 느끼며

토해내는 울분들

 

이젠 삭풍에 밀어 내고

엷은 웃음 띄워 본다.

 

 


 

 

박영기 시인 / 지금만큼만 이라도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지금만큼만 이라도

가질 수 있기들 원합니다

 

더 원한다면

미소가 사라질 것 같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불안해서

찡그린 얼굴로만 살아 갈듯 합니다

 

경제력

건강

아무리 부족하고 불편하다 해도

지금만큼만 이라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고 읽음에 있어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양껏

표현 할 수 있는 재주가

지금 보다 더 있기를 바래 봅니다.

 

 


 

 

박영기 시인 / 자화상

 

 

장마 빗소리에

아침 문을 열어본다

 

게으른 차림새는

밤새 요란을 떨었는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허연 머릿결이

외로움도 그리움도

삶의 음표로 다가온 영혼은

아침이슬 임에도 동공을 젖게 한다

 

빗방울에 비춰지는

낯설게 다가오는 남루한 형체들

 

미혹의 덫에 걸려

한번쯤 미치도록

너를 껴안고 싶다.

 

 


 

 

박영기 시인 / 허무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은

제어 장치가 없다

베풀고만 싶은 뿐이고

그저 뜨거운 열정뿐이다

 

집착인지

스토커인지도 모르고

허락 없이 한없는 연모(戀慕)의

감정으로 아파하고 슬퍼한다

 

스스로도 미친 짓 이라는 것에

어둠의 독을 마시려 하니

슬픈 사랑에 눈물샘 가득차고

어쩔 수 없는 백치(白癡)의

사랑에 혼(魂)이 나간다

 

별은 함께 있어야 빛나는 것인데

결국 또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박영기 시인 / 홈통

 

 

음,음, 헛기침 같은 음이 있다

 

몸이라는

음에 갇힌,담긴, 숨은,

 

음들

가늘고 긴 다리 음음음음음음

채 펼치지 않은 날개 음음

렌즈콩만한 검은 눈

음음

 

식물인지 동물인지 광물인지 먼지의 먼지인지

 

가슴 음을 솜털 음이 덮고 있다

발톱 음이 배음을 찢고 있다

음이 음을 파먹는다

 

음이 찬 몸이 텅 비어 있다

텅 빈 몸음이

꽉 차 있다

 

말들이 깨어난다 배다르고 종

다른 음의

딸꾹질

 

목구멍을 넘어 온다

음, 음, 음,

 

 


 

 

박영기 시인 / 지금만큼만 이라도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지금만큼만 이라도

가질 수 있기들 원합니다

 

더 원한다면

미소가 사라질 것 같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불안해서

찡그린 얼굴로만 살아 갈듯 합니다

 

경제력

건강

아무리 부족하고 불편하다 해도

지금만큼만 이라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고 읽음에 있어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양껏

표현 할 수 있는 재주가

지금 보다 더 있기를 바래 봅니다

 

 


 

박영기 시인

경남 하동 출생. 2007년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