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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덕규 시인 /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이덕규 시인 /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덕규 시인 /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

 

보통리 저수지 수문이 열렸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굳은 안면 근육을 풀고

제방 밑 칠흑 같은 암거를 빠져나온

싯푸른 물결이

꼭 일 년 만에 암내 맡은 짐승처럼

입가에 허옇게 거품을 물고

동네방네로 달려나간다네

지난밤 몽정하듯

만수위로 찔끔, 흘러넘친

낮은 수로의 비릿한 물 내음을 맡은

실한 허벅지 같은 논두렁이 벌써

제풀에 지르르지르르 무너져 내리네

출렁출렁 허겁지겁

그러나 샅샅이 더듬어가는

거친 물길 따라 스르르 치맛단 올라가듯

바싹 긴장한 마른 논바닥이 젖으며

타닥타닥, 블라우스 단추 뜯기는 소리 들리네

마침내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거센 물살을

밤새 온몸의 뼈가 다 녹아내리도록

흥건하게 받아들인 새벽녘, 그

큰 논배미 위에 엎드려

시퍼렇게 출렁거리는 넓은 등짝의

사내 하나, 또다시 이웃집 논두둑을 넘실거리네

 

 


 

 

이덕규 시인 / 끙게질

 

 

 큰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를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게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엔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설설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넣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고개를 들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에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이덕규 시인 / 그 많던 일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내기 끝내고 제초제 살포한 논과

식물 전멸제를 뿌린 논두렁에는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풀을 집 삼아 살던 온갖 벌레와 곤충들의 밤낮으로 울려 퍼지던 합창이

한순간 뚝, 그쳤습니다

풀잎 끝에 맺혀 기생하던 수많은

어린 이슬도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눈도 못 뜬 채 죽었습니다

이제 곧 여름인데

개구리와 뱀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터로 나가기 위해 도열한 병정들처럼

위풍당당 벼들만이 오와 열을 맞추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사람을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훈육되고 양육되었습니다

용수로와 배수로 고인 물속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따가운 햇살만이 오색 빛 기름띠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살충제와 살균제를 뿌린 논밭은

그 무엇도 얼씬거리지 못하는 지뢰밭이 되었습니다

장마 끝에 다시 항공방제가 있었습니다

맹독성 농약 유제가 들판 허공에 날리며 찬란한 무지개를 띄웠습니다

(그 무지개다리 건너간 사람 몇몇 영영 돌아오지 않고)

덕분에 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들판이 깔끔했습니다

 

 


 

 

이덕규 시인 / 자서自序

ㅡ『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인 / 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

 

 

허공에 발판을 놓고 길을 내는 그는

비계공이었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거대한 자본의 산맥을 넘어오는 높새바람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지상과 연결된 안전고리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하는

 

지상에선 날마다 더 높은 곳을 주문했다

현장사무실 앞 풍향계는

늘 한 곳으로 고정된 채 첨단의 극점을 가리키고 있었고

촉박한 예정공정의 천후표에는

기후와 상관없이 늘 해가 떴다

이윽고 그는 지상의 통제권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아슬한 난간 위에 서서 아주 잠깐

고개 들어 훔쳐본,

 ……

아, 현기증이란

구름궁전의 뜨락을 거닐 듯

얼마나 황홀한 산책인가

 

마침내 그곳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지상과 연결된 모든 안전고리를

남김없이 풀어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오랫동안 지상에 묶여 있던 부표 하나가

둥싯 떠올라.

 

뇌 단층촬영실

모니터 화면에 번져가는 구름 한 점

 

 


 

 

이덕규 시인 / 호박

 

 

높은 담장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언제쯤 손을 놓을까 망설이는 사이

쥔 손이 먼저 슬그머니 놓아버린

 

벼랑의 딸,

 

밑도 끝도 없이

막막한 허공에서 쿵, 떨어졌달 수밖에 없는 당신

 

여전히 애 낳는 얼굴로 힘준 채 썩어간다

시커먼 검버섯을 찌르면 손가락이 굳은 표정 속으로 푹푹 들어간다

자리를 뜨자 그동안 꿍쳐놓은 십 원짜리 동전이 좌르르 쏟아진다

 

두엄 더미에 내다버린 엄마,

들어낸 자궁 속에서 꼬물꼬물 대가족이 기어나온다

 

 


 

 

이덕규 시인 /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놈이었습니다』 등.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2016. 제9회 오장환문학상.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경기민예총 문학위원장을 역임. 경기민예총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