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심재휘 시인 / 지저귀던 저 새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심재휘 시인 / 지저귀던 저 새는

심재휘 시인 / 지저귀던 저 새는

 

 

가끔씩 내 귓속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

 

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

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

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

사나운 후회들 가져가라고 나는

먼 숲에 귀를 대고

한 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후는

울음 떠난 둥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아

넓고 넓은 귓속에서 몇 나절을 나는

해변에 밀려나온 나뭇가지처럼

마르거나 젖으면서 살기도 한다

 

새소리는

새가 떠나고 나서야 더 잘 들리고

새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나도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심재휘 시인 / 가슴 선반

 

 

가슴 언저리에 선반을 달고 그곳에

당신을 위한 차 한 잔을 얹어드리지요

 

식기 전에 와서 드시면

나는 강바닥에 닻을 내린 작은 배

 

흘러가는 강물에 묶인 몸 일렁거려도

흘러간 것들을 돌아볼 수는 없어도

내가 읽는 책 속에서

새들은 씨앗인 듯 몇 개의

식지 않은 글자들을 물고 가겠지요

 

어느 훗날 쓸쓸한 거리에서

차를 다 마신 표정의 나무를 만난다면

가지 끝에 달린 꽃의 문장이

내 표정을 만날 때

 

당신이 마시고 간

차 한 잔의 인사라고 생각할 게요

 

나는 오늘도

가슴에 선반을 달고 그곳에

차 한 잔을 올릴 게요

매번 식어만 가는 차일지라도

차를 우리는 일은 우리의 일이잖아요

 

 


 

 

심재휘 시인 / 그 빵집 우미당

 

 

 나는 왜 어느덧 파리바게트의 푸른 문을 열고 있는가, 봄날의 유리문이여 그러면 언제나 삐이걱 하며 대답하는 슬픈 이름이여, 도넛 위에 쏟아지는 초콜릿 시럽처럼 막 익은 달콤한 저녁이 내 얼굴에 온통 묻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가 않구나

 

 그러니까 그 옛날 강릉우미당을 나와 곧장 파리바게트로 걸어왔던 것은 아닌데, 젊어질 수도 없고 늙을 수도 없는 나이 마흔 살, 단팥빵을 고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이제는 그 빵집 우미당,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아침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은 이미 이별한 것, 오늘이 나에게 파리바게트 푸른 문을 열어 보이네, 바게트를 고르는 손이 바게트네,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마른 바게트, 하지만 씹을수록 입 안에 고이는, 그래도 씹다 보면 봄날 저녁 속의 언뜻언뜻 서러움 같은, 그 빵집 우미당, 누구에게나 하나씩 불에 덴 자국 같은

 

 


 

 

심재휘 시인 / 언문으로 쓰여진 밤

 

 

옛 사람이 섬에서 보내온 귤차를 우린다

이내 밀려오는 향기와 달리 그 남쪽은 멀고

또 희미하여서

무언가 얼비치려다 곧 맑아지는 찻물의 표정

차 안에 여러 맛이 섞여있는지 몇 가지가

어렴풋한 저녁이다

 

가지를 쥔 저녁 새가 조금씩 옆걸음하여

밤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저녁은 또 조금 어두워지고 어두워져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입 안에 물컹하며 남아도는 것은

그저 맹물 맛인데

입도 아니고 코도 아닌 곳을 스치는 야릇한 향기

이런 심심한 연애가 세상에 만연하여서 아프고

아팠다는 말만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저녁들

 

따뜻한 맹물 위를 겉돌기만 하는 향기처럼

서로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은 왜 만나

어스름 쪽을 돌아보는 오늘 내 눈빛은

언문으로 쓰여진 밤이다

 

 


 

 

심재휘 시인 / 척도

 

 

뜨자마자 지는 초생달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母川의 돌 틈에서 장엄하게 숨을 거두는

연어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또 누구를 기억합니까

 

억만년을 날아와 내 눈에 박힌 저 별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빗금 하나로 사라지는데

 

어느 나무의 껍질이

바람에 툭 떨어지는 소리

 

지금은 쓸쓸한 밤하고도

아직은 오늘인데요

당신은 아직 거기

그대로 있는 건가요

 

 


 

 

심재휘 시인 /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집 근처 거리에

감 하나가 제가 만든 그늘 속에 떨어져 있다

한때 단단했던 것도 너무 오래 붉으면 무른다

물러서 터진 것이 질척거리는 보도로 흘러나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는다

 

이별의 몸이 흥건한 땅바닥에서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으로

괜히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와 있는 것이다

 

뒷걸음으로 가면

주지 말았어야 할 상처들과

들지 말았어야 할 길들을 그냥

지나쳤을 것만 같고

뒷걸음으로 더 멀리 가면

잘 여문 사랑을 다시 찾을 것만 같은데

끝내는 떨어져 온몸으로 가랑비 맞는 감

 

떨어지고 나서도 마저 익어가는 감 하나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아서

그 붉은 속살 속으로 걸어들어가보는 것인데

뒤뚱거리며 앞으로만 가는 저녁을

이 몸은 벗어날 수가 없다.

 

 


 

 

심재휘 시인 / 행복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심재휘 시인 / 베스킨라빈스, 서른한 가지의 이름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글자를 읽지 못해 수업이 지루해지면 호명되던 그는 생일이 빨라 육 년 내내 일번이었다. 풋과일을 먹지 말자고 학급 회의 때마다 손을 들고 일어섰지만 때 이른 과일을 따와서 아이들이게 나누어 주던 현우, 어짊과 어리석음이 온전히 한 몸이던 전현우.

 

 왼쪽 어깨의 지워지지 않는 우두 자국처럼 옥순이는 내 생애의 첫 짝이었다. 반이 바뀌어도 친구들은 두고두고 나를 놀렸다. 중학교 입학식 날 아침, 눈이 많이 짝짝이던 그녀, 아직도 성이 기억나지 않는 그냥 옥순이.

 

 십 년 전의 추석날 밤이었던가, 고향의 어느 나이트클럽 앞을 지날 때 누군가 날 불렀다. 두리번거리던 내 앞에서 그랜 저 뒷문 차창을 마저 내리던 종필이, 중학교 때까지는 친했던 종필이,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간암으로 죽자 어린 삼남매 를 키우면서도 더욱 예뻐졌는데, 허리 숙인 사내들 사이에 나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종필이.

 

 하지만 베스킨라빈스에서는 언제나 세 가지만 골라야 하지. 서른한 가지의 이름들 앞에서 늘 나는 망설이지. 조금씩 핥아 먹는 추억이지. 아이스크림을 녹지 않게 잘 포장해서 서둘러 집으로 가는 일. 그게 인생이지. 더 파먹을 것도 없는 빈 통을 바라보는 일, 쓸쓸하지.

 

 


 

심재휘 시인

1963년 강릉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국문학 박사).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 『중국인맹인안마사』 『용서를 배울만한 시간』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저서 <한국현대시와 시간>. 2002년 제8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