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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영철 시인 / 다대포 일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최영철 시인 / 다대포 일몰

최영철 시인 / 다대포 일몰

 

 

해지는 거 보러 왔다가

해는 못보고

해지면서 울렁울렁 밟아놓고 간

바다의 속곳, 갯벌만 보네

 

해가 흘려 놓고 간 명백한 지문

어서 바닷물을 보내

현장검증 중인 지문을 지우지만

갯벌은 해가 남긴 길고 긴 증거를

온몸으로 사수하네

 

시부렁 지부렁 등을 밀어붙이며

그 지문에 다 쓰여 있다고

 

한 여인이 재빨리 와

이 과격한 문서를

저 혼자 읽고 숨기네

 

뒤꿈치로 쿡쿡 밟으며

쑥쑥 지우며.

 

-『시작』 창간호

 

 


 

 

최영철 시인 /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최영철 시인 / 홍매화 겨울나기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애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것은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애

매화 한 떨기가 알아 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애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애.

 

 


 

 

최영철 시인 / 소주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른 토악질로 여기까지 오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히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최영철 시인 / 야성은 빛나다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게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 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 바닥 곳곳에 풀어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최영철 시인 / 쑥국

―아내에게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애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시집 『찔러본다』 (문학과지성사, 2010)

 

 


 

 

최영철 시인 / 시인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매미는

제 외로움을 온 천하에 외치고 다녔네

해밝으면 곧 날아갈 슬픔

비는 너무 많은 눈물로 뿌리고 다녔네

아무데나 짖어대는 저 개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그렇게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그 바람에 새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지나쳐 왔네

저녁이 오기도 전 바위는

서둘러 제 몸을 닫아버렸네

잡았던 손길 뿌리치고 물은 아래로

저 아래로 한정없이 흘러가고 있네

천둥의 잘못은 너무 큰 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은 것

시인의 잘못은 제 가난을 밑천으로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른 것

 

 


 

최영철 시인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일광욕하는 가구』 외, 육필시선집 『엉겅퀴』.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백석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수상. 부산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