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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시인 / 지극히 개인적인 일
한 노인이 리어카에 매달려 오늘을 싣고 언덕을 오릅니다 굽이치며 떨어지는 해를 잠깐 끌어안은 노인과 언덕이 어두워지고
밤새 안녕을 구걸하던 옆집 노인을 눈여겨봤다면 정신 줄을 꼭 잡고 있으라 했을 겁니다 이웃의 죽음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기도 하니까요 열린 문틈으로 덥수룩한 어둠이 힐끔거려도 이런 일로 마주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다가올 외면들이 끝끝내 말을 걸어 오는 저녁
노인이 상(相)을 볼 줄 안다면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다 말해 버리고 싶어 돌아오려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렵게 이루려는 걸 누군가 손쉽게 이루는 걸 보기도 했을 테니까요
살면서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있는지 풀어지는 안도가 쓸모 있는지 어디서부터가 삶의 무덤인지 묻고 싶은게 많겠습니다만 한결같다는 말이 뼈 있는 말인지 그날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정신만 차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리 인색해서 되겠냐며 다시 오늘을 무르러 가겠답니다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이명선 시인 / 가족력
가족력은 불치가 아니고 완치가 어려운 난치였지만 형의 파리지옥처럼 끈끈해 병은 아니라 생각했다 구태의연하게 늘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같은 밑바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에 빛을 들이듯 서로의 어린 체온 속을 파고들다 잠이 들곤 했다 형의 방에선 침엽수가 자라고 거들먹 거리는 형이 싫어 가끔은 거들 말을 찾아보았다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런 걸 안 잡아 가고
말하지 않으면 가족인 줄 모르는 그런 가족을 이상적인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한 방 먹 이다가도 결정적일 때 한 방이 되어 주던 형. 한 방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요 믿는 구석 이기도 했다 형의 닫힌 방에선 침엽수가 세차게 자라고 형이 키우던 파리지옥은 며칠째 잠만 자고 있다
나는 가족력을 다시 찾아보았다
이명선 시인 / 흙의 감정은 재현되지 않는다
견디고 싶어서 한 사람의 고백을 듣기 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비를 기다리며 둥글어지는 땅의 체취처럼 장미가 붉어질수록 우리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어떤 고백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바라볼수록 침묵이 되어 돌아왔다
신열에 시달리는 당신의 독백을 짚어 보다가 우리는 뒤돌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헤어지는 날이 많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당신의 영혼에 비가 비친다
알약을 녹이는 입 안에서 기도 소리를 들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을 한 옥타브씩 오르다 흙의 감정을 밟고 오른다는 미안함에 나는 흩어지고
하루가 하루를 다독이고 있는 건 부서지는 흙의 감정을 그러모으는 일
잘 배운 이별이 시야를 흐릴수록 꽃을 편애했던 당신의 미간이 흔들려 나는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였다 당신의 계절 속에 피어 있는 꽃의 감정은 미완의 환절기 속에서도 살아갈 것이다
어떤 마음을 빌려서라도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에서
이명선 시인 / 아스파라거스
아스파라거스를 굽는 저녁 양초를 켜면 너는 행복에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고 했어
식탁 한쪽에 놓인 작은 어항은 어디서나 눈 맞추기 좋은 자리에 있고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듯 어항 위로 물고기가 떠오를 때마다 신들의 이름도 같이 지워졌지
균열을 맞추려는 것처럼 한 세계가 한 세계의 멸망을 기록하며 지켜보려는 것처럼 이제 막 둥글어질 세상처럼
어항은 공실이 되어 갔어
너는 물고기의 생김새에 따라 신들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였지
늘 터져 보고 나서야 아픈 말도 수용할 줄 알게 되는데 우리는 각자의 바다를 묻고 돌아와서도 살펴보지 않았어
극복은 극기나 선의가 아닌데
아스파라거스를 굽는 식탁 위로 한 세계가 쿵 하고 떨어지고
이제는 양초를 켜지 않아도 한때 우리 곁에 신들이 살았었다고 말하면
믿어 줄래
이명선 시인 / 꿈은 가파르고 밤은 길어
겨울은 폭설이 잦고 예민했다 한번 가 봐야 할 골짜기들이 많아 꿈은 가파르고 밤이 길었다 착해서는 부지런한 세상을 살 수 없어 하얗게 일렁거려 보려는 것이다
매사냥꾼처럼 토끼 가죽을 쓰고 구름에 쌓인 골짜기를 올려다보면 어디로든 갈 수 있겠다는 찬 눈빛이 몰려다니고
천재지변에서 누군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 같아 몇 개의 검은 심장을 가지러 갔다 단숨에 녹아내릴 것 같고 어제의 일이 대수로워지고
우리는 한 가족처럼 토끼 가죽을 쓰고 토끼굴을 찾으러 갔다 얼음 구덩이에 빈손을 넣어 보는 일이 잦았다 매사는 묶이고 손톱은 자주 닳아 정색을 하거나 생색을 내다가도
흔한 것이 천한 게 아니라 말했지만 한 개의 굴만 파는 너의 바람도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서로에게 연민을 건네면서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일이라 나는 겨울을 물리적 고립이라 했고 너는 겨울을 절대적 낙원이라 했다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2022)
이명선 시인 / 자율배식
쏟아져 나오는 자율은 율법이 없습니다 공원에 서 있는 줄과 품이 헐렁해진 사람들은 최초의 입에 대한 연장입니다
멈추면 사라질 사람들이 무빙워크처럼 걷고 있습니다
대역 없는 무대라서 내려갈 수 없습니다 중얼거리던 한사람이 사라져도 막간에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색도 없이 눈여겨볼 시간도 없이
사라진 방향에서 웅성거린다 해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라진 사람의 체취가 두리번거려도 새삼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공원이 한철이라면 꾸려지는 나도 한철입니다 돌아서면 금방 엔딩으로 흩어질 우리지만 아직은 공원의 구석입니다
쌓일 때마다 차가워지는 일인용 식기처럼 끼니마다 왜 일용할 양식에는 온기가 없을까요
쏟아져 나오는 자율은 율법이 없습니다 정오를 향해 걸어오던 맨 뒷사람처럼 식어 버린 건 내가 아닌지
막간을 이용해 쉬고 싶지만 되돌아오는 무빙워크는 다시 태우지 않을 것입니다
이명선 시인 / 퍼레이드
나는 플랫폼을 서성이는 구름의 입자처럼 건널목 밖으로 밀려나간 저항의 걸음처럼 내리막을 모르는 목줄을 잡고 기차를 기다린다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깨끗이 흘러간 사람을 기다리듯 기차를 기다린다 어느 새는 어느새 엎드린 바닥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날 바닥과 날 새는 끈기 있게 나의 목을 조여 올 것이다 빼곡한 심장들 속에서 다 같이 선명한 꿈을 꾸는 날엔 비의 이빨에 물린 듯 전신의 털이 흠뻑 젖고 저 바닥에 깔린 잠이 나를 데려가지 않게 기도해준다면 어느 새는 예의를 갖추겠다고 길들여진 의식 까지 따라오곤 했다 케이지 안에 있을 때처럼 나는 여기에서도 하루에 한 채씩 영혼의 집을 짓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소하거나 지나가거나 어쩌면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간판 없는 점짐이 성행하고 오늘의 운세는 벌과 용서를 동시에 말해주기도 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돌아갈 길을 묻는다면 반려에 대하여 귀띔해주고 싶었으나 어느 새떼가 나의 살갗을 헤쳐 놓았으니 목줄에게 기색을 내비쳐도 될 것이다 밖은 지루한 혹한인데 퍼레이드에 참가할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내가 저들 가까이 살았다면 좀 더 바르게 살았을까
이명선 시인 / 그 밖을 수긍하고 수용하더라도
내 피부색은 바꿀 수 없고 검정엔 검은 규정이 없고. 돌아가는 지구엔 도는 규정이 없고 한 사람이 세운 규칙 엔 새로운 규정이 없고 규정을 한마디로 정리해 너에게 전해 줄 수 없고
설사 내 말이 틀린다 해도 헤아릴 가능성은 전례가 없고 나도 모르는 기분엔 빈틈이 없고 터널 속엔 오렌지 색 지붕이 없고 도시엔 전경이 없고 스트라이크 존에서 스트라이크를 외쳐도 감정엔 스트라이크가 없고
비록 코너웍이 잘 된다 해도 지나간 승부처가 될 수 없고 잘난 인간에게 잘난 규정이 없고 그 밖을 수긍하 고 수용하더라도
내 감정을 수긍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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