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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란 시인 / 간극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
이향란 시인 / 간극에 대하여

이향란 시인 / 간극에 대하여

 

 

 네가 내게 뻗어오거나 내가 네게 뻗는 모든 것이 왜 전부라고 느껴지지 않는지, 마음의 핏대를 올리며 너와 나 서로에게 충실하였으나 왜 쇳소리 나는 바람이 불고 황사비가 내리는지.

 

 목숨 다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을 듣는 순간 나 또한 그러하다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서성대는 공허 앞에서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너는 늘 수많은 걸음으로 내게 다녀가지만 단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사람처럼 문밖에 여전히 그렇게 서있다.

 

 


 

 

이향란 시인 / 따뜻한 사전

 

 

그대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것처럼

친구와 다정히 어깨동무하고 걷는 것처럼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는 것처럼

 

허공의 나비를 고운 눈길로 이끄는 것처럼

큰 키의 나무를 선선히 올려다보는 것처럼

 

하늘에 떠있는 것들이 노래 부르는 것처럼

오지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처럼

 

불을 지피듯 반짝거리는

낱말, 낱말들의 따뜻한 집

 

 


 

 

이향란 시인 /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구둣가게에서

 

 

 초원을 누볐을 짐승의 휘날리는 전언은 너무나 질겨 자세히 읽어내기가 좀 난해하다 그 짐승의 출생부터를 정점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한가로이 풀을 뜯었을 본능부터 읽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따라서 사라진 짐승의 진부한 역사는 덮고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을 읽도록 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사이사이 가죽을 바늘로 엮고 무늬를 찍고 맨질맨질 타성의 윤기를 입히던 어느 사내, 짐승의 추억 따윈 새카맣게 묻고 자신의 절룩거리는 발자국을 성큼성큼 주워 담던 사내

 

 울퉁불퉁한 과거는 지우고 가보지 못한 길 위의 욕망, 희망, 절망을 두드리고 잇고 바르던 그. 끊어져 폐쇄됐거나 휘어졌거나 새 길에 의해 버림받았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억센 손에 쥐어진 길들의 발버둥치는 아우성이 그저 신날 뿐, 그 구두 완성되면 또각대는 칠백 번째 여자와 결혼하게 될 텐데

 

 먼 곳으로부터 흘러온 목이 짧은 짐승과

 숨은 사내의 인생을 싱싱하게 발췌해 읽는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이향란 시인 / 民魚湯

 

 

 갑자기 비가 오다가 갑자기 눈으로 바뀌는 그런 봄날에 당신과 나는 인사동 네거리에서 처음 만나 점심을 했지요. 사골처럼 뽀얀 국물에 부릅뜬 민어의 흰 살점을 발라먹으면서 당신과 나는 낮술 한잔도 가볍게 곁들였지요. 처음이라는 생소함을 잊고 서로의 머나먼 고향바다를 견주어가며 파도로 출렁대다가 짭조름한 밴댕이젓에서 우연히 젓가락을 부딪쳤지요.

 

 한잔 술에 당신의 얼굴은 불콰해지고 나는 되레 창백해질 때 창밖엔 후두둑 한 떼의 비바람이 스쳐갔지요. 나는 왠지 쫓기듯 말을 뱉고 당신은 그 말이 아까운 듯 재빠르게 주워 담는 사람. 그런 당신의 귀는 후박나무 잎 같았지요.

 

 처음이라는 건 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마지막의 또 다른 말.

펄펄 끓던 뚝배기의 민어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무렵 당신은 당신으로 나는 나로 선명해지면서 탕보다는 지리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서로의 고개를 끄덕였지요.

 

 어느새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여전히 같은 세상 같은 골목의 식당에서 땀 흘리며 민어탕이나 시원하게 비워내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을 넘지 못한 채 밥과 반찬을 깨끗이 싹싹 비워내고는 또다시 부딪힌 눈길 사이로 희미한 웃음만 간간이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밋밋한 사람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사람의 물결이 우러나는 거리에서 지느러미처럼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더욱 담백해진 모습으로 우리는 각자

 

 


 

 

이향란 시인 / 네가 내게 사랑을 고백할 때

 

 

 네가 내게 사랑을 고백할 때 시리아에서는 민간인을 향한 정부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고 아프리카의 어느 들녘에서는 야생의 짐승과 짐승이 서로를 먹기 위해 피를 흘리며 물어뜯고 싸웠다.

 

 아, 부드럽고 달콤하여라 사랑의 고백이 내 몸을 휘휘 돌며 피처럼 뜨거워질 때 생계를 감당하지 못한 한 가정의 아비는 17층 아파트에서 나비처럼 훨훨 생의 그늘을 날렸고

 

 너의 사랑 고백이 호수 한가운데에 이는 파문처럼 내 영혼 속으로 번져 갈 때 달리던 자동차에 치여 개죽음이 된 누군가의 심장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도 날 수 있는 하늘 그곳 어디엔가 수백 명을 태운 비행기가 갑자기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할 때, 바로 그 하늘 아래 색색의 튤립이 만발한 곳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객의 축하를 받으며 한 발 두 발 결혼 행진을 하던 중이었다.

 

 너는 아니 네가 내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 순간 수많은 내가 다시 살아나거나 나도 모르는 내가 죽어버리는 슬프고도 기막힌 황홀이라는 것을.

 

 


 

 

이향란 시인 / 새에 대한 독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새들이 추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가 천상인지 몰라 허공에 온 몸을 부딪치며

  어쩌면 좋으냐고 울음을 떼거지로 매달며

  가라앉은 세상을 날개로 퍼 올리는

  한 순간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날 수 없는 마음을 위해

  지상에 비문을 후두두둑 꽂는

  저들의 심중

 

  어스름한 저녁,

  한 떼의 허공이 속눈썹에서 발 아래로 미끄러진다

 

 


 

 

이향란 시인 / 기우는 것들에 대한 단상

 

 

 세상 모든 것 다 기운다

 다정한 어깨 넓은 가슴이 아니더라도 따스한 방향을 찾아

 고개가 기울고 마음이 기운다

 

 빈 거리를 떠도는 낙엽들은 뿌리를 향해

 어둠은 빛으로, 풀잎은 바람 이는 곳으로 뒤척이며 기운다

 높은 건물은 낮은 건물을 안고서

 수많은 길들은 사람을 지나 숲에게로

 바다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향해

 

 기울지 않는 것은 마음이나 몸이 굳은 것

 웃음과 울음의 촉수를 못 찾고

 스스로 무너지지 못한 채 딱지만 키우는 것들

 

 식탁에게, 옷에게, 침대에게, 그리고 가슴에게조차 기울지 못한 채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하루가 비스듬히 기울고 있다

 

 


 

이향란(李香蘭) 시인

1962년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2002년 첫 시집 『안개詩』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너라는 간극』. 2009년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