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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수아 시인 / 시를 쓰지 않으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
황수아 시인 / 시를 쓰지 않으리

황수아 시인 / 시를 쓰지 않으리

 

 

나, 시의 시구문(屍口門)에 와서야

늙은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마음의 점자를 읽는다.

"모든 시작이 시작되고 끝이 끝날 무렵

기억이 망각을 만들고 망각이 기억을 부를 때쯤

시를 쓰지 않으리."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

시를 써 보았다는 건 다 살아 본 흉내를 내느라

일찌감치 노후했다는 것, 죽기 직전까지 노후했다는 것.

 

시를 쓰기 위해 마음은 수없이 무너뜨리면서도

삶은 한 번도 망가지지 않았으므로, 나에게 모순이란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하면서도

단한 문장으로도 점화하지 못했던 마음

수천 개의 단어로도 통하지 못했던 우주

기억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새벽과

 

그 새벽을 닮은 행간, 그러므로 나,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으리.

 

쓰고 싶던 단 하나의 마음이

짧고 고약한 두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시집 <뢴트겐행 열차 >에서

 

 


 

 

황수아 시인 / 임신

 

 

내 뱃속에서 음표가 하나 자라기 시작했다

그 음표는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으므로

아직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존재와 존재의 가능성 사이에 귀를 갖다 대면

음악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 위대한 지휘자가 무명의 음표 앞에 서는 것을 기대한다

그가 악보 위에 그려진 단 하나의 음표를 깨워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을까

 

열 달의 먼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악보는 바다로부터 음표를 건져 올리는 어부의 그물을 닮았다

나는 내 자신이 어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해저에서 올라오는 선율의 입질을 기다리며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이유 없는 사랑을 느낀다

 

무명의 음표가 축축한 콩알처럼 발아되는 동안

나는 내 자신이 음표였던 순간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물 안에서 물 밖으로 흐르는 비밀스런 음악은

몸 안에서 몸 밖으로 흐르는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바다에 잠기면 내가 있던 자리에서

침묵을 닮은 음표가 연주될 것이다

 

 


 

 

황수아 시인 / 최초의 시

 

 

 너의 눈을 바라보던 최초의 시간을 기억해. 그 시간이 새겨진 최초의 문장을 기억해. 눈이 눈을 담는다는 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기억해. 너의 눈을 조각하던 최초의 창작을 기억해. 네가 장님이 될 때까지 네 눈동자, 네 눈동자의 각을 사포로 문지르던 내 최초의 실패를 기억해. 너의 눈을 닮은 보름달, 그 보름달의 둥근 예언을 기억해. 아니 그것은 최초의 예언이 아닐지도 몰라, 모르지만 보름달도 매일 상처받는 걸 몰랐던 시절, 하현으로 기울던 그 최초의 공포를 기억해. 청춘에 멀미를 하던 최초의 오만함을 기억해. 이를테면 너는 일찍이 장님이 되었고 네가 잃어버린 눈동자가 흰 조약돌로 노후하여 사소한 백지 위를 이유 없이 굴러다녔지. 아직 모든 것을 기억해. 보기 위해 보지 않던 세상, 읽기 위해 읽지 않던 문장, 우리가 미련 없이 버렸던 추상의 문맥들을 너는 기억해? 기억을 위한 기록과 습작노트는 사라졌지만 우리가 시라고 불렀던 최초의 마음을 기억해.

 

 


 

 

황수아 시인 / 추상적인 여자

 

 

이른 새벽, 공원 연못가에 여자가 서있다

짧게 문 담배 위에는

갈색 립스틱이 묻었다

여자는 말이 없다

부러진 하이힐

구멍난 스타킹

 

여자가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린다

여자의 꼭 쥔 오른손 사이로 붕어밥이 흘러내린다

붕어떼가 모여든다

붕어떼가 여자를 보고 웃는다 잠시동안

여자는 그것이 비웃음이라 생각한다

여자는 조롱의 밤을 지나왔다 충분히

조롱 받을만하다고 여자는 느낀다 하지만

부러진 하이힐

구멍난 스타킹

그리고 잘 기억나지 않는 남자

 

모여 있던 붕어떼가 흩어진다

마지막 한 마리의 붕어가 여자를 떠나갈 때까지도

여자는 붕어를 용서할 수 없다 여전히

남자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러진 하이힐

절뚝거리며 걸어온 밤

여자는 추상적으로 말이 없다

여자의 추상적인 우울 속에 남자는 없다

여자는 없다

 

 


 

 

황수아 시인 / 히키코모리의 쉬폰 원피스

 

 

봄이 쉬폰 원피스를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시위대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다만 쉽게 희망차고 싶었다

 

목련이 어두운 길목에 떨어졌고

봄의 쉬폰 원피스에 꽃의 그림자가 스몄다

외로움이 만개하고

벚꽃이 긴장을 놓아버리는 순간에도

마음은 호숫가로 행군하며 그 풍경이

장관이라고 했다

 

틀에 박히게 틀어박힌 히키코모리가

세상의 비극은 봄에 시작된다라고 쓰는 동안

나무는 꽃을, 꽂은 계절을, 계절은 사람을

쉬운 방식으로 놓아버렸다

고봉밥 밥알들처럼 숫자를 셀 수 없는 꽃잎들이

계절의 소화기관으로 녹아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봄은 마음에게

외롭지 않은 하루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쉬폰 원피스가 펄럭이지 않게

조심히 걸었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3년 봄호

 

 


 

 

황수아 시인 / 출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부터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존재가 태어났다.

태반의 동굴을 따라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축축한 울음소리

 

기억의 길을 거꾸로 걷다가 문득,

가장 오래된 비밀은 내 몸 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푸른 씨앗을 자궁에 묻으며

나 또한 한때 누군가의 몸 속에 묻혀

오랫동안 목격될 수 없는 존재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이유 없이 사랑 받고

이유 없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몸속에서 발아하는 가장 오래된 비밀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은 사람이

시간의 시작과 공간의 끝을 묶어놓는다

양수의 온기를 타고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두터운 울음소리

 

 


 

 

황수아 시인 / 잠원동 미세스 롯데캐슬

 

 

 틈만 나면 내 가랑이를 파고드는 당신이 오늘은 식도로 넘어왔어. 목구멍이 칼칼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냐. 꼬챙이처럼 내 몸에 찔러 넣은 당신이 나를 싹 다 해먹는 동안, 천만에 발광하는 몸을 다시 자라나게 하는 고루한 명품관이 있는걸. 그런 줄 모르고 심심한 몸의 맛을 견디기 위해 노란 불빛이 새어나는 거대 빌딩이란 소스에 나를 찍어먹는 당신. 이 아리따운 몸의 토핑을 한번 봐. 당신이 파고들 때마다 척척 달라붙는 A급 드레스를 입고, 나는 가장 싱싱하게 늙은 퐁듀. 이봐, 좀 더 맛있게 먹어줄 수 없겠어?

 

 


 

황수아 시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8년 《문학수첩》에 〈통조림〉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뢴트겐행 열차』. 안양예고와 대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