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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재 시인 / 마지막의 들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
김선재 시인 / 마지막의 들판

김선재 시인 / 마지막의 들판

 

 

내 다정한 안부를 전해요

둘이 듣는 혼잣말처럼,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속삭임처럼

 

여기는 지구의 첫 별이 뜨는 곳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모서리를 접는 곳

이상하게 부풀었다가 기쁘게 사라지는 곳

 

그러니 잊어도 좋아요 구름을 구획하는 바람이 우리를 거둘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여행을 떠나요

기억할 필요 없어요

뚫린 천장 위로 날아간 새가 자신의 곡선을 기억하지 않듯이

처음 태어난 지도를 따라

단종(斷種)될 말들의 사막을 건너가요

 

모래의 책을 건널 때마다, 넓어서 캄캄할 때마다

검은 구름이 달려왔다

나는 절망을 절정으로 바꿔 적기 시작했다

 

내가 건넌 것은 구름의 푸른 웅덩이

내가 지나가야 할 곳은 푸른 웅덩이 속 검은 구름

 

나는 어제보다 느려졌고 나는 내일보다 조금 길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슬프거나 아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언제나 처음인 저녁 쪽으로

마지막의 들판 쪽으로

 

그러니 이제,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아요

묻은 것과 묻지 못한 기억 밖으로

여행을 떠나요

돌고 돌아 돌아오지 않을 쪽을 향해

당신의 짧은 눈썹에서 햇빛이 사라지기 전에

 

곧 흩어질 내 인사를 전해요

 

 


 

 

김선재 시인 / 사탕이 녹는 동안

 

 

 사탕이 녹는 동안, 한세상이 지나간다. 오래된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결말. 너는 그것을 예정된 끝이라고 말하고 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 그것이 인생이라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새롭지는 않았으나 아는 노래도 아니었다. 다만 열꽃을 꽃이라 믿던 날들을 돌이키며 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 후회와 미련에 붉은 줄을 그어놓고 오늘도 어디선가 새는 울겠지. 내일도 어디선가 새는 새로 울 거야. 흔들리는 시선이 고요해질 때까지 우리는 몸을 낮추고 눈을 낮추고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끝의 시작은 보는 것. 본 것을 읽는 것. 읽은 것을 잊는 것. 잊은 것을 다시 잊는 것. 이제 우리 앞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다. 검은 물이 흘러나오는. 천천히 낡아가는.

 개미가 줄지어 간다 녹아버린 사탕을 끌고

 

 마지막까지 마지막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어디로든

 

 


 

 

김선재 시인 / 오늘 하루 무사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은 벌써 이렇게 했다는 말일까

 

 과거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이를테면 어디서나 달려오는 자전거나 어떠했든 헤어지는 사람들 미끄러지는 사람들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필요 없는 일들이 필요한 날이었다

 

 풍선처럼

 풍선을 부는 일처럼

 

 바람은 바람의 의지일까 지구의 의지일까 우리의 의지일까 풍선만큼 줄어들며 생각했다 잠이 든 새를 대신해서 생각했다

 누군가 있는 힘껏 옆구리를 꼬집을 때까지 대신 살고 대신 웃었다

 

 돌아오면 탁자 위에는

 반쪽만 남은 사과

 

 화투점을 치는 엄마는 자주 뒤집혀서 입을 닦고서야 나갔고 우리는 닦아도 닦이지 않는 검버섯처럼 아무렇게나 피었다

 

 그러면 못 쓴다는 말은 이미 못 쓰게 됐다는 말이다.

 

 하루 아침에

 다른 얼굴이 되어서

 

 각자의 주름 사이로 몸을 숨기고

 

 검게 그을렸다

 

 


 

 

김선재 시인 / 숨

 

 

등을 든 행렬이 따라왔어, 창백한 레이스를 늘어뜨린 북쪽 해안가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렸지, 둥둥

 

나는

관에 담겨 떠내려가고 있었어

도착하면 알게 되는 거기로

 

새로 태어난 얘기를 해줄까, 찻물에 밥 말던 전날에는 몰랐던 얘기,

 

함께 영화를 보던 중이었는데 나만 영화가 되었어, 안과 밖 흔들리고 바람이 쓸고 가는 지붕 풀풀 날리는 대한(大寒)인데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났어, 화면 안으로

 

너는 리모컨을 든 채로

나를 보고

 

바다가 꾸역꾸역 넘어왔다

통(通)하려고

 

검은 속내를 어찌할 수 없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작살

하얗게 질리는 화면,

 

거기서 멈춰 봐,

이렇게 끝나면 안 되니까

 

미리 보기를 할 걸 그랬어

새로 태어났는데?

새에게도 전쟁은 있을 거야

 

나는 멈춰 있다 산발하고 드러누워,

 

숨쉬지 않는다.

잠깐 멈췄으므로

울지 않아도 되는 세계

 

여기서 끝낼까

등을 든 사람들은 멀어지고 북소리가 더 가까워질 테니까

 

나는 물결의 모서리에 걸려 너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없고 너는 나를 들여다볼 수 없다 복선이 되어야 하니까

극(極)으로 흘러가서

열린 결말이 되어야 하니까

 

미안,

 

여기가 끝이야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 '신작특집'에서 -

 

 


 

 

김선재 시인 / 작용과 부작용​

 

 별을 보았습니다 한꺼번에 깨어나는 별

 괜찮습니다

 죽지 않아요

 잠시 누워 있습니다, 손을 뻗은 채, 손가락에 감기는 건 바람의 꼬리, 꼬리뼈를 말아야 해요, 살려면, 깃털을 골라야 하죠, 쉬지 않고 쉬지 않는 법을 알아갑니다

 오리 꿱꿱, 비둘기 구구

 날지 않는 새를 구경하는 아이들

 광장은 넓고 다리는 짧으니까, 바퀴가 필요해요

 힘을 빼고,

 넘어지는 쪽으로 넘어질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무릎을 치면, 벌어지던 나비구름 거기서 멈추죠, 커튼은 부풀고 벽에서 떨어진 화병은 선물로 받은 화병, 목이 부러진 선풍기는 더 이상 돌지 않습니다 나만 돌다 그치는 하루, 외출한 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있는 힘껏 바닥을 끌어당기면 지나가는 비행기, 두꺼운 그림자가 나를 덮고 있는 동안 튀어 오른 빛들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고

 천 개의 조각으로 나뉘었다 다시 하나가 된 뒤엔 손을 떨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좀 더 누워 있습니다

​ 폭발한 별들이 꼬리 그으며

 재가 되는 걸 보려고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 1월호 중에서

 

 


 

 

김선재 시인 / 열대야

가도 가도 여름이었죠. 흩어지려 할 때마다 구름은 몸을 바꾸고

풀들은 바라는 쪽으로 자라요. 누군가 길을 묻는다면 한꺼번에

쏟아질 수도 있겠죠. 쉼표를 흘려도 순서는 바뀌지 않으니까.

곁에는 꿈이니까 괜찮은 사람들. 괄호 속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지킬 것이 없는 개들은 제 테두리를 핥고 햇빛은 바닥을 핥아요.

나는 뜬눈으로 가라앉고요. 돌 속에는 수많은 입들이 있고,

눈을 가린 당신이 있어요.

빗소리는 단번에 떨어져 수만 번 솟구치고요,

앞도 뒤도 없이 일제히 튀어 오르는 능선들.

갈데 까지 가고서야 공이 되는 법을 알았죠.

잎사귀처럼 바닥을 굴러 몸을 만들면,

바람을 숨긴 새처럼 마디를 꺾으면, 안은 분명할까요.

뼛속을 다 비우면, 바깥은 안이 될까요. 아직 가도 가도 어둠이에요.

하루가 가도 하루가 남는, 손을 뒤집어도 손이 되는.

그러니 당신, 쓴 것을 뒤집어요. 다시 습지가 될 차례예요.

 

 


 

 

김선재 시인 /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안과 밖을 지운 이상한 마음의 쓸슬한 정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밖을 바라보니 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은 작고 좁고 캄캄해

이 방처럼 이 방의 상자처럼 상자 안의 편지처럼

편지 안의 나처럼

 

안을 보여준 적 없으니 내보일 바깥도 없었다

다만 모든 목소리는 고백의 형식

 

이러다 영영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젋은 부부는 자신들의 실패를 믿을 수 없었다

흔들리며 흔들었다

말을 해 나를 따라해봐 내가 네 애비야 이 에미 애비도 모르는

 

처음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전부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얻은 적이 없으니 득음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공이 되어 튀어 오르기를 반복할 뿐

공(空)이 되기를 희망할 뿐

그러니까 탄력적인 사람이라고 해둡시다

탄력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해둡시다

 

밤마다 내 양들은 늙었다 천천히 나와 함께

에미 애비도 모르는 내가

에미 애비도 없는 내 양들의 목자가 되어

실낱같은 잠에 기대

운명의 실패를 쥐고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마음이 중요합니다 자세가 필요합니다

똑바로 앉아본 적 없는 나에게는 들려줄 풍경이 없습니다

소리 내어 부를 이름도 갖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려진 이름 위에 마음을 얹어

침묵의 행간 위에 진심을 얹어

 

누구도 돌아갈 길은 찾지 못한다

심장 소리를 내어준 이여 지금은

안과 밖을 지운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곧 아무 일도 없는 그림자가 걸어와

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실낱같은 길이 있는 동안은 가야 한다

어떻게든 어디론가

 

 


 

김선재 시인

1971년 경남 통영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부문, 2007년 《현대문학》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얼룩의 탄생』 『목성에서의 하루』. 소설 『그녀가 보인다』.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