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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병호 시인 / 달 안을 걷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
김병호 시인 / 달 안을 걷다

김병호 시인 / 달 안을 걷다

 

 

내가 한 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바늘 돋은 혀로 말간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그믐 모양으로 흐르던 푸른 수맥의 흔적

그 사이로 비늘 떨군 물고기가

해질녘 주름진 빛과 몸 바꿔 흐를 때

내가 제일 나중에 지녔던 울음과

몸담아 흐른 기억마다에 피는 상여꽃

 

봄을 앓는 어머니가 누이의 머리채를 흔들고

꽃뱀이 누이의 다리를 휘감는다

한참 누이를 사랑하던 꽃뱀은

은사시나무로 다시 몸을 바꾸고

아버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으로 나가

허리를 꺾는다

어머니는 누이를 향해 자꾸만 손나비를 날리는데

검은 살의 물고기들이 달려와 은사시잎을 뜯는다

아버지는 자정의 종소리로 울리고

 

달빛 속의 누이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바람을 읽으면 별이 될 수 있을까

잎 큰 나무들이 바람을 모아

제 안에 나이테를 그려놓고

잎 떨군 나는,

눈 먼 새들의 울음을 모아 내 몸을 헹군다

 

 


 

 

김병호 시인 / 백야

 

 

손잡이 뜯긴 장롱은 하루 만에 치워졌는데

거울은 며칠째 제자리다

 

빈집처럼 작은 발자국들은 얼어 있고

표정은 닳아 없어진 겨울 골목

 

착하게 살다 가장자리로 나선 거울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

 

외롭고 치명적인 몇 장의 구름과

두 겹의 생처럼 핀 십이월

 

함박눈 몇 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도무지 닿지 않는다

 

 


 

 

김병호 시인 /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금줄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이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볕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김병호 시인 / 아무의 노래

 

 

기차가

지나간다

 

이곳은 바다에서 먼

나흘쯤의 밤낮

당신의 위로가 세상의

나머지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느리고 텅 빈 시간을

모퉁이도 없이

기차가 지난다

기적은 어떤 밤이 된다

 

나는

아직,

이 나라의 말을

배우지 못하였다

 

지평선만큼 긴

자정을 지난다

기차가 지나면

눈이 내릴 것이다

 

마음을 깃발처럼

펄럭일 수 있다면

기적은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김병호 시인 / 이월

 

 

신작 시 청탁을 했습니다

가타부타 답이 없이 그는 점심이나 하자 했습니다

 

아직 꽃이 오지 않아 바람이 찼습니다

 

그는 냄비 속의 조린 무를 찾아 고봉밥 위에 올려주며 시는 나중에 줄 수 있겠다,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막내딸 이야기와 새로 배우는 동시 이야기도 했습니다

 

며칠 지나 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툭, 툭, 돌멩이를 차며 걷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봄이 지나도 이월이 가지 않았습니다

 

 


 

 

김병호 시인 / 커브(Curve)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나요

 

하늘에도 커브(Curve)가 있어 별자리나 구름이 급히 기우는 자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봄을 앓고 망명을 오래 생각하는 동안 오후는 다만, 다정한 거짓말에 몰두하는 자세입니다

 

섭섭하지 않은 궁리와 아무렇지도 않은 수작으로 마음 속에 마음을 잠급니다

 

이제, 당신 없이도 고독을 매수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의 백핸드 발리처럼 훌쩍, 넘어오는 명랑한 이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울음을 들여다보면 그제야 꽃이 지는 기적이 있습니다

 

구름과 허공 사이에 놓인 당신을 넘어 질주하는 허기는 까맣고 딱딱하게 오후를 태웁니다

 

당신은 우주에 떠 있는 커브 안으로 사라집니다

 

 


 

 

김병호 시인 / 이월

 

 

 신작 시 청탁을 했습니다

 가타부타 답이 없이 그는 점심이나 하자 했습니다

 

 아직 꽃이 오지 않아 바람이 찼습니다

 

 그는 냄비 속의 조린 무를 찾아 고봉밥 위에 올려주며

시는 나중에 줄 수 있겠다,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막내딸 이야기와 새로 배우는 동시 이야기도 했습니다

 

며칠 지나 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툭, 툭, 돌멩이를 차며 걷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봄이 지나도 이월이 가지 않았습니다

 

 


 

 

김병호 시인 / 마지막 문병

 

 

아직 이름이 없는 병이어서

지나가고 있는지 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제의 안부나 일용할 다행은 지루하고

그저 함부로 아름다워져 날마다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억울한 표정은 닳아져 여하한 밤이 많아졌지만

눈에 띄면 외로워지는 투명인간처럼

너는 매번 저만치에 있었다

 

선량한 잠은 멀고, 젖은 발자국만 가득한데

너의 무릎을 베고 눕고 싶었다

 

너는 이미 오래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장 어두워졌다

 

파도처럼 바람이 분다

안녕도 없이 때아닌 꽃들이 피어있다

불시개화(不時開化)

 

오로지 너만이 저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는 막차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병실에서

나의 죄가 너를 알아볼까 몹시도 두려운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너는 묻지 않았다

대신 실그러진 미간을 쓰다듬어 주었다

 

 


 

김병호 시인

1971년 광주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97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 2001년 문화예술진흥원의 신진작가 지원사업의 수혜.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연구서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 등.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