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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 / 은행나무 길목
초저녁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두 정거장 더 가서 하차해야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내려 걷는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정육점에 들러 삼겹살 한 근 산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17년을 살아온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서른 중반에 신혼살림을 차려 딸애 하나 낳아 그냥저냥 잘 살다가 쉰 살을 넘겨 떠나려 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 해가 꼭 사과 같아! 뜨겁고 달콤한 것들만 품고 이곳을 떠나야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 주말부부를 하던 신혼 때 들르던 빵집이며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이며 언제 찾아가든 문이 열려있던 집 앞 세탁소까지
저녁 식탁 위에 도란도란 꺼내놓고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박성우 시인 / 자귀꽃
게으름뱅이 자귀나무는 봄을 건넌 뒤에야 기지개 켠다 저거 잘라버리지, 쓱쓱 날 세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연초록 눈을 치켜뜬다 허리춤에서 부챗살 꺼내 펼치듯 순식간에 푸르러져서는 애써 태연한 척,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 말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 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비탈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
박성우 시인 / 몸에 맞는 그릇
저 개들은 몇 그램의 죽음을 포식한 걸까 퍼석퍼석한 사료를 먹은 개들이 목마른지 혓바닥 길게 늘려 물을 핥는다 가끔 혀끝으로 빨려들어가는 바람 개 사육장에선 바람이 소화제다 느글느글해진 졸음이 개밥그릇에 앉는다 개들은 졸음을 경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애써 컹컹거리지 않는다 조금 남아 있던 의심이 풍경을 한번 깜박거리게 했을 뿐이다 파리가 눈꺼풀에 앉아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해주자 위장에 있던 죽음이 살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죽음이 모두 소화된 뒤에야 개는 깨어난다 몇 킬로의 죽음이 더 누적되어야 편안해질까 죽음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철사줄이 목을 조이는 동안 털이 타들어가면 개는 곧 편안해질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먹은 죽음을 토해낼 것이다 거처를 잃은 죽음은 전에 살던 사육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새로 사온 강아지에겐 물려받은 밥그릇이 크겠지만 곧 몸에 맞는 그릇으로 변할 것이다
박성우 시인 /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 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고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면 모가지라는디
박성우 시인 / 카드 키드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박성우 시인 / 해바라기
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 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몃 손 포개면서,
우리 집 해바라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성우 시인 / 장산도 가시내
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헌답시고 도망쳐 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읍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 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헌다 춘향가도 수궁가도 흥부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소리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올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 범벅으로 울려 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
-시집 <가뜬한 잠> 창비시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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