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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아 시인 / 숨기는 옷
숨기는 옷으로 성별이 생긴다.
부끄러운 옷.
숨기는 옷에서는 끝의 냄새가 난다. 아술아슬한 말끝 에 입는 옷, 단단하게 늙은 늑골이 물렁해진 끝.
버클에는 뭉개진 립스틱과 색 바랜 빨래집게, 뒤집힌 베갯잇, 올 나간 스타킹 같은 무심한 하녀들만 걸렸다. 혼자만 보기로 하고 방 안에 숨겨놓은 타인. 거울은 옥상 위 늘어진 빨랫줄의 텅 빈 미열을 비췄다. 정원에는 자갈이 많았다. 자갈은 스스로 정원을 유혹하지 못하지만, 변명을 둘러대며 굴러다녔다. 자갈을 굴리지 말아쥐, 홍에 취하면 정원은 꼼짝없이 타버렸다.
수염을 기르고 오른쪽 젖가슴을 용감하게 잘랐다. 멋 지게 활을 쏘려면 시끄럽게 울지 않아야 하니까. 오락가락하던 창살이 기어코 터져 나오지 않도록 숨기는 의자가 있고 종아리가 있다. 빨랫줄에 걸린 두 개의 생식기. 달팽이가 느린 건 사랑도 해야 하고 전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네를 타고 여름 별장에 다녀올 거야. 매끈한 팔짱을 끼고 하얗고 검은 털을 가진 말을 타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숨겨놓은 옷들을 어른스럽게 꽉 쥐고
이린아 시인 / 돌의 문서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이린아 시인 /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린아 시인 / 불면증 동생과 나는 떨어지는 것들에 며칠 동안 이름을 붙이는 중이에요 그곳에 가면 저녁이 될 거야, 하고 팔짱을 끼면 우리는 이미 며칠이 되었지요 보드라운 가슴 털을 가진 손바닥 인형과 염소의 눈을 단 종 목걸이, 모서리마다 윤이 나는 트라이앵글, 작은 말만 할 줄 아는 캐스터네츠 깨고 달아나는 토끼의 귀를 잡아 눈이 빨개질 때까지 눈으로만 말해요 당근을 집어 들고 오래 걸리는 이야기를 우걱우걱 씹어요 우리는 언제쯤 나를 말할 수 있나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가 다시 웃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요 동생과 나는 아무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하루가 더디게 홀러가는 통증은 유치하거나 촌스러운 것이 없죠 생각은 늘 깨지 않아 생생하고 나는 언제나 침대 밖을 위해 기도해요
우리는 다시 당신을 기다릴 필요가 없지요
이린아 시인 / 아홉 개의 채널과 엄마의 보자기
며칠 동안 방을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밤 한낮의 불면들은 모두 이곳으로 놀러 와도 돼 아홉 개의 채널과 엄마의 보자기, 고음을 기록할 수 있는 책과 헝클어진 결과를 버릴 구석이 생겼어 택시 기사는 알아듣지 못했던 주소로 찾아와서 말하지 운이 좋으면 빨래도 혼자 마를 수 있겠네요 벽이 두꺼운 애인과 벽이 얇은 애인은 동시에 와도 돼 홍얼거리는 허밍으로 철저하게 학습된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찾아진 밤 갑자기 출세한 소녀와 줄무늬로 죽게 된 스트라이프의 음절 이곳에서는 마음껏 사과를 먹을 수 있지 커튼을 입은 여자와 쌍으로 된 것만 찾아다니는 몽상가의 두 눈알은 곧거나 굽은 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미끄러운 밤이야 작을수록 잘 죽지만 잘 살아남는 작은 밤 기념일 사이에서 몽유에 걸린 화분과 구세주가 몇 번이고 나타날 거라 믿는 주인 할머니의 난쟁이 의자처럼 만만한, 한 번쯤 태어나볼 만한 밤이야
이린아 시인 / 산책 미운 발이 가방 속으로 들어갔어요 숨죽여야 하는 발, 밖에서는 미운 발이지만 안에서는 자신을 포갤 수 있는 다정한 발이죠 가방이란 원래 단 세 벌 정도의 경유지를 옮겨 다니는 것이에요 꽉꽉 구겨 넣으면 여섯, 일곱 벌도 가능한 계모는 아이를 여행 보내려 했을까요? 통째로 그림자가 되었어요 정말로 깜깜한 곳에 있다 보면 나는 분명 존재하지만 나는 분명 나를 못 믿고 있고 나는 나를 따라 할 뿐이죠 눈을 뜨고 있어도 뜨고 싶어요 지퍼 사이로 들어온 공기는 아껴 마셔야 하죠 온갖 덜미들과 또 빌미들과 잘잘못을 구분하는 건 차라리 보호하는 거예요 태어나서 가장 두꺼운 옷을 입었지만 더 이상 아무도 할퀼 수 없지만 네 개의 바퀴로 더 빨리 도망갈 수도 있지만 제자리는 늘 안전한 곳이었지만 바퀴만 남은 채 손잡이가 없는 아이와 단 한 벌의 경유지는 아이의 꿈들이 모두 반성할 때까지 풀숲을 돌았어요
이린아 시인 / 필라테스 언니
우리 몸의 가장 특별한 점은 갈비뼈로 구분된 2층짜리 집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2층에서 긴장을 풀길 원하지만 1층을 단단하게 안정시키지 않으면 이 집은 계속 무너지죠
1층을 안정시키려면 맞아요, 다들 근력 운동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데 생각보다 간단해요 우리가 움직이는 동안 생겨나는 이 반대의 힘에 끝까지 저항하기만 하면 되죠 때로는 끝까지 반대해도 된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절대 넘어지지 않으니 이 흔드는 힘을 끝까지 버텨내기만 하는 거예요 자! 그 힘을 똑바로 느껴보자고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알게 되면 중심을 잘 잡을 거라 생각하는데 실은 자기 몸이 마구 떠는 걸 끝까지 겪다 보면 중심은 이미 집 안에 있죠 모든 걸 포기할 때 그게 잠시 멈춰선 거라 생각하는데 이 매트 위에 여전히 서 있는 거죠
다들 잘 서 계시네요! 아 2주 전이었나, 어떤 분이 오셔서 제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당신의 삶은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내 몸도 안전합니까? "네. 당신의 몸은 안전합니다”
그날 펑펑 울었지 뭐예요 그러니 이제 슬슬 여러분의 몸이 언제 가장 파르르 떨리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럼 집에 가서 끝까지 버티는 거예요 아셨죠?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2023,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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