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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희선 시인 / 르네상스로 가는 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유희선 시인 / 르네상스로 가는 길

유희선 시인 / 르네상스로 가는 길

 

 

1

손바닥만한 아이 옷들이 하룻볕에 다 자란 듯

담 너머로 펄럭거린다.

 

석양은 마당가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서쪽 빨랫줄부터 매달려오는 붉은 사과들

 

초록 스웨터 여자가 아기를 업고 사과를 따고 있다.

사과를 딸 때마다 옆구리에 달린 조그만 두 발이 종처럼

흔들린다. 나무 그늘에 떠가는 동그란 빛들

 

그것은 온전한 한 컷 이미지

완벽하게 진공 포장된 순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람의 날개를 달고

일생을 아로새기는

단 몇 컷의 찰나, 바짝 마른 옷가지는 잘 개켜져

서랍 속으로 돌아간다. 어둠 속 빨랫줄에는 허공만 나부끼고

 

2

어느 화가의 정물대에서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는 어제보다 먼 길을 갔다.

양파는 그림을 버리고 내달리다 결국, 다시 양파가 되었다.

화가는 양파가 없는 양파 그림으로

불멸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르네상스에 도달한 사람,

위대한 창조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삽으로 퍼다 버려도 이 땅의 양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손으로 문지르면 지워질 것만 같은 나의 붉은 얼룩들도

결코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는다.

양파는 그림보다 걸음이 빠르다.

 

3

허공에 발을 뻗쳐본다.

양파를 먹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렁하게 썩는 냄새 너머 르네상스로 가는 길이 있다.

 

 


 

 

유희선 시인 / 꽃 샘

 

 

롱패딩을 입은 젊은 여자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찻길을 무단 횡단한다

막, 은행 문을 밀고 나온 계절처럼

 

봄에는

봄만 있는 것이 아닌 듯

사계절이 묵은 빚처럼 뒤섞여 온다

 

연년생 언니의 까닭 모를 트집도

생트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갓난아이 젖을 모조리 말려

핏덩이로 들어선 악착은

엄마 것인가, 내 것인가?

 

뒤늦은 질문에

겹겹, 뒤섞여 오는

꽃과 꽃샘바람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빈정은

온 생애를 거느리고 온다

 

누가 빼앗고

누가 빼앗겼는지

눈먼 사랑과 눈먼 바람의 뿌리가

사사건건 깊고 깊다

 

오래 억눌린 바람의 말은 어눌하다

어쩌면 내게도 묵은 빚이 지워져 있었음을

이제야 바람의 말이 조금씩 들려온다

 

너무 일찍 품에서 내몰린 그때의 바람일까

꽃이 끌어 안는다

서둘러 꽃이 지는 이유라도 되듯이

 

 


 

 

유희선 시인 / 저녁이 오기 전에

 

 

해가 지는 긴 산마루를 성근 머리카락으로 간신히 덮어 놓았다

불을 켜 놓은 듯

안쪽이 훤히 보였다

 

이마에 붙인 반창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솔숲에 낮게 걸린 태양이 아슬아슬했다

남은 해를 보겠다는 의지에 불타 갑작스레 산길을 뛰어오르듯이

 

한달음에 달려

멀고 먼 시간과 마주섰다

미명의 수숩음 속에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던

그 새벽의 어린 태양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을,

 

그는 반창고 두 개를 차례로 떼어 보여주었다

어쩌면 그것이 저녁이 오기 전에 나를 찾은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골 깊은 길들이 연안으로 퍼지며

얼굴 가득 부드러운 표정으로 흔들렸다

 

비켜간 한걸음이 거느리고 온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의 가장 짧은 인사

그 옛날의 오늘이었다

 

서쪽 하늘 너머 부드러운 둥덜미로 떨어지는

지는 해의 두근거리는 심장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

한참을 흘겨보았다

 

우리의 유치한 몸짓이 사소한 기적처럼 좋았다

맞바꿀 것 없는 깨끗한 빈손으로

저녁이 오고 있었다

 

- 계간 《시사사》 2022년 가을호에서

 

 


 

 

유희선 시인 / 살구나무와 젖소

 

 

축사 담장에

살구나무 세 그루

소젖 한 번 빨아보지 못하고

 

살구는 익어가네

일 년 내내 김 오르는 똥오줌 냄새로

 

살구는 통통해지네

녹슨 자물쇠 너머

명례공소 종소리

낙동강 물을 퍼 올려

살구를 씻어주네

젖소들이

눈을 끔뻑일 때마다

살구 떨어지는 소리

침 흘리는

비탈진 축사로

굴러가는

살빛

살구들

 

-<시인의 눈> 2012년. 한국문연

 

 


 

 

유희선 시인 / 구월 장미

 

 

양악, 이런 어려운 단어가 요즘 유행어다

악골은 턱뼈라는데

상악은 위턱, 하악은 아래턱, 그러니 양악은 위턱과 아래턱이다

그러나 악다구니는 순 우리말이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친근한 樂은

그래도 턱과 무슨 해괴한 연관이 있긴 있는 것 같다

 

향기로운 유월 장미는 잠자던 그를 깨웠고

또 한바탕 소나기처럼 붉게 내렸고

구월에도

막바지에도

아직 고춧대에 매달린 잘디 잔 새파란 고추처럼

장미는 핀다

작은 고추 맵다하더니 참말,

지리멸렬 작은 꽃송이 끝물 장미

산비탈 철조망에 악착같이

턱걸이하고 있다

 

아, 나는 구십에도 말을 배울까, 꽃을 피울까

2050년에는 평균수명이 구십 세라 하는데

그때도 그는 꽃 피는 말들로 잠에서 깨어날까

지금은 땅 속 어디선가 검게 썩고 있는 말들

양악수술, 구제역, 침출수, 이런 어려운 말들의 탄생처럼

40년 뒤에 부글부글 싹틀 미지의 말들

불러볼 수 있을까

이빨 빠진 턱을 우물거리며 악다구니로 꽃잎을 펼칠까

당신과 나

향기로운 그 어느 유월의 추억으로

멸종도 실종도없이

더는 꽃 피지 않기를

 

-계간 『열린시학』 2012, 봄호

 

 


 

 

유희선 시인 / 연년생

 

 

젖이 말라버리다니,

 

달동네 유모에게 보내진 갓난쟁이 언니는

한쪽 젖을 먹고 자랐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지만

양쪽 젖을 배불리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언니를 측은해했다

그럴수록 나는 엄마 치마폭에 숨어들었다

감출 수 없는 편애의

젖줄, 평생의 강물이 흘렀다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도 강물이 흘렀다

강물은 오른쪽과 왼쪽의 감정을 만들었다

내게 더없이 좋은 언니

내게 더없이 나쁜 언니

 

분간할 수 없이

점점 더 무성해지는 언니, 언니, 언니……

무성한 숲을 사이에 두고 무심해지기로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너무 멀리 흘러왔다

 

안전하고 무지몽매한 곳

뿌리 깊은 혈육 간의 무성한 숲 너머, 문득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오, 비로소 상상할 수 있는

아버지의 그 말씀

 

모든 이유는 그랬다

어느 냉담한 젖가슴에 안긴 갓난아이 모습

언니는 엄마 젖을 먹지 못했다!

 

메마른 그 강물의 시원을 생각한다

울음보 삐죽빼죽, 설운

나의 어린 언니

 

 


 

 

유희선 시인 /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병이 자라듯

가시박 덩굴이 자란다

 

골수이식을 마친

정환이의 혈우병이 재발되었다

 

이번 고비도 잘 넘기고 돌아오겠다던 스물여섯 살 정환이가

무균실 인큐베이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닭처럼

잔혹한 결투 중이다

 

집요한 본색을 드러내며 무균실 숨통을 조여온다

피를 본 쪽은 정환이었다

 

갈퀴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붉은 피를 마시는

 

짱짱한 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진공관 속

타들어 가는 불꽃,

피는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눈을 감으면 온통 엉겅퀴밭

넝쿨의 표정도 사람의 표정도 아닌 온통 엉겅퀴밭

 

가파르게 치닫는

8월의 노래 너머로

 

새파랗게 뜯겨나간 하늘 한 조각

 

 


 

 

유희선 시인 / 월하에게

-김달진문학관 가는 길

 

 

출발하셨습니까?

국도 25번 하이웨이로

하늘과 구름과 산들이 한가득 밀려옵니다

진해로,

진해로 가는 길입니다

 

터널을 지나 또 터널입니다

속도를 올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속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깜깜했던 당신의 모습이 얼핏 보입니다

오로지 한 곳, 그곳을 향한 맹목의 초점이 생긴다는 것을

터널 속을 달리며 알았습니다

그때 그시절도 그랬습니까?

 

아, 생애 처음의 속도로 달려봅니다

가족을 두고

금강산 유점사로 떠나는 당신의 깜깜한 몰두가 보입니다

고달프고

고집스러운 외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적막한 터널이 영원처럼 뻗어 있습니다

 

못다한 사랑을 품고 우리의 일생이 흘러갑니다

밤의 노래가

올빼미의 노래*가 흘러갑니다

이름 모를 여인과

이상을 향한 고뇌와 고결함에도

백 년을 질러 터널을 빠져나옵니다. 저 멀리

찢어진 은박지 같은 바다가 반짝입니다

남방 천리

고향 땅

 

기다림의 땅으로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

이곳에서 금강산 유점사는 다시, 먼 길입니다

월하에 닿는 길, 단단한 껍질 속 더는 쪼갤 수 없는

씨앗들의 꿈결 같은 여정

뜻밖의 인연도 신비한 열매일까요?

소사동 들판에

팔월 땡볕 한창입니다

 

*(올빼미의 노래): 김달진 시인 시집 제목

 

 


 

 

유희선 시인 / 거울을 들고 다니는 사내

 

 

바위가 따뜻해지는 시간

차가운 피를 데우는 뱀들의 시간

빛과 거울의 시간

 

한 청년이 거울 속에서 피어난다

우울에서 빠져나와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황홀한 도취

소용돌이치는 파편들

미처 담기기도 전에

거울 밖으로 뜨겁게 쏟아지는 에곤실레

 

훔친 엄마의 전신거울을 옆구리에 끼고

 

무작정 걷거나

우뚝 멈춰 서거나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집요함과 과잉의 길

악동과 천재 사이에서 분열하는

무수한 분신들

그를 추종하는 후예들

 

거울을 보듯

사진찍기에 열광한다. 빛이 작열하는 그곳엔

현기증 나는 조급한 갈망이 있다

왈칵 쏟아낸,

텅 빈 거울 속

 

그는 옆구리에 전신거울을 끼고

아직 가출 중이다

 

-월간 《현대시≫ 2023년 8월호

 

 


 

유희선 시인

서울에서 출생. 상명여대 미술교육과 졸업. 이화여대 대학원 서양미술학과 수학. 2001년 경남 마산 MBC 〈경남여성백일장〉장원. 2010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하얀바다』 『꽃의 온도』. 경남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창원문인협회, 마산교구가톨릭문인회 회원, 동인 <가향>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