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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혜 시인 / 아까시 꽃 피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이영혜 시인 / 아까시 꽃 피면

이영혜 시인 / 아까시 꽃 피면

 

 

아기분 하얀 향내 밀려온다

내게서 지워진 아이들이

조막손으로 바람을 부채질하고 있는 거다

 

움텄던 싹들 파내고 난 후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던

폐사지 흙냄새처럼 싸한 마취약 냄새

 

크지 않는 기억 속의 아이들

흰 젖을 몽글몽글 게워내며

아까시 나무 안에서

일 년 치의 안부를 날려 보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손사래 치며

밀어 보내는 아릿한 전언

내 빈 둥지 가득히

아기분 잊혀진 냄새 차오른다

 

 


 

 

이영혜 시인 / 송곳니

 

 

컴컴한 목젖 다 열어놓고 잠든

초로의 사내를 본다

성글어진 갈기와 거친 수염

이마에 찍힌 王 자 주름 또렸하다

 

살기등등하던 뾰족한 치관(齒冠)은 사라져 버렸어도

긴 치근(齒根) 은 여전히 성성하게 남아

생피 냄새를 쫓고 있다

 

석회동굴처럼 깊고 푸른 입속에서

가끔씩 늙은 맹수의 목쉰 포효가 새어 나오는 걸보면

그는 지금 아마

눈발 휘날리는 아무르 강가나

시베리아의 벌판을 내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뿌리에 기둥 박히고

그 위로 세라믹 송곳니 단단히 세워지면

저 사내, 의기양양하게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다시 한번 육식의 수성(獸性)으로 번뜩이리라

 

잠결의 사내,

잇몸이 근지러운지 자꾸 입가를 실룩이고 있다

 

 


 

 

이영혜 시인 / 아라홍련*, 뒷모습의 그대에게

 

 

700년이 한꺼번에 피었습니다

목간木簡에 기록된 글자들은 색 바래어

기억처럼 역사처럼 희미한데

당신은 타임캡슐에 꼭꼭 담아뒀던 시간을 발아시켜

제 앞에 꽃 피우셨습니다

 

가야금을 사랑하셨던 당신

신라의 칼 앞에 무릎 꿇으며

연잎보다 넓은 어깨 시들었지요

당신과 나 마지막 목슴 던진 아라가야 땅

핏물로 붉던 그 연지蓮池는 사라졌지만

당신은 돌널무덤에서 환생하여

수십 생 전, 꽃씨로 묻은 약속을 지켜내셨습니다

저 불꽃무늬 토기의 불꽃보다 더 활활 타는

분홍빛 꽃잎 열두 장 열어 현현顯現하셨습니다

가야에서 고려를 지나 여기까지 온

그윽한 당신 향기 나를 휘감아

오늘 이곳은 청산입니다

 

천 년의 그대, 만 년의 그리움으로

다시 떠나보냅니다

약속으로 남기신 연밥에 가만 귀를 기울이니

'뜰흥 징징 동 당......!!

당신 켜시던 열두 줄 가야금 소리가

가는 연대를 타고 수십 윤회의 시간을 흘러옵니다

껍질 단단한 기다림의 연실蓮實 하나

오늘부터 가슴 속 깊이 품어 키우겠습니다

어느 후생에 당신과 함께 싹 틔워

찬란하게 나도, 꽃 피우겠습니다

 

*아라홍련 :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목간木簡이 출토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성산산성(사적 67호) 내 연못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인공 발아를 통해 700여 년 만에 꽃을 피웠다. 함안군은 함안이 아라가야였던 점에 착안해 이 연꽃을 ‘아라홍련'이라 부르고 있다.

 

 


 

 

이영혜 시인 / 파문

 

 

수심(心)만 가득한

수심(深)을 알 수 없는

저수지 한 가운데

달이 빠졌다

 

저 달덩이가

다 가라앉을 때까지

나 평생

파문을 끌어안고 살리라

 

 


 

 

이영혜 시인 / 이모를 경배하라

 

 

"<급구> 주방 이모 구함"

자주 가는 고깃집에서 애타게 이모를 찾고 있다

고모(姑母)는 아니고 반드시 이모(母)다

 

언제부턴가 아줌마가 사라진 자리에

이모가 등장했다

시장에서도, 음식점에서도, 병원에서도

이모가 대세다

단군자손의 모계가 다 한 피로 섞여

외족, 처족이 되었다는 말인지

그러고 보니 두 동생들 집 어린 조카들도 모두

늙수그레한 육아도우미의 꽁무니를

이모 이모하며 따라다닌다

이모(婕母)란 어머니의 여자 형제를 일컫는 말이니

분명 이모는 난데

이모(二母), 이모(異母), 이모(易母)?

 

그렇다면 신모계사회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것인데?

"이모, 여기 참이슬 한 병"을 외치는 도시유목민,

저 사내들의 눈빛이 처연하다.

왁자지껄, 연기 자욱한 삼겹살집은 언제나

모계씨족사회의 한마당 축제날

젖통 출렁이며 가위를 휘두르고 뛰어다니는

절대 권력의 저 여전사,

싱싱한 사냥감을 토기 가득 담아내올 것 같아

나도 한 번

"이모 여기요"하고 손을 들어본다

바야흐로 여족장의 평화로운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모를 경배하라!

 

 


 

 

이영혜 시인 / 하지정맥류

 

 

언제부턴가

엄마의 다리에 검푸른 길이 솟아올랐다

 

곧 바닥을 드러낼,

경작할 수 없는 칠순의 폐답(廢畓)

가늘어진 팔과 다리 창백한 살빛 아래

드러난 고지도(古地圖)를 읽는다

저 길을 밟아 밥을 벌어 오고

수십번 이삿짐을 옮겼을,

저 길에서 나의 길도 갈라져 나왔을 것이다.

이제 길은 응이처럼 툭툭 불거지고

점점 좁아지며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다

 

아마도 앙상한 저 생의 무늬는

내가 다 갉아 먹고 버린

낙엽의 잎맥

파삭파삭 금새라도 부서져 내릴 듯한

위태로운 길을 따라가며

잠시 내 발길을 되돌려 보는데

어느새 내가 밟아 온 길들이

내 팔뚝과 정강이에도 퍼렇게

거미줄처럼 인화되고 있다

 

 


 

 

이영혜 시인 /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먼,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 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 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 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 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린지 오래인, 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품위로 천지를 채운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식물성 남자 하나 찾습니다

평생 배필로 삼아

생을 다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그 몸 이룬 탄소 원자 소멸할 때까지

한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이영혜 시인

서울대 치과대학 및 치과대학원 졸업. 치의학박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8년《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천년의시작, 2014)가 있음.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외래 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