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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창완 시인 / 기분 좋은 아침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
김창완 시인 / 기분 좋은 아침

김창완 시인 / 기분 좋은 아침

 

출근하다

골목길에서 똥누는 아이를 보았다.

엉덩이는 길쪽에 두고

눈은

쪽문 안에서 연탄 가는 엄마의 엉덩이에 두고

손에는 풀빵 한 개 꼬옥 쥐고

똥누고 있는 아이의

복숭아 같은 엉덩짝을 보았다

이른 아침 햇살보다 빛나고

엊저녁 내 꿈보다 강렬한 똥무더기

오늘의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의 출근길

임신중절약, 성병약, 장기매매, 여공구함

그런 말들로 오염된 전봇대와 담모퉁이를

돌아나오면 골목은 끝나고

생각에 깔려 길게 누워 있는

검은 길과 만난다.

 

 


 

 

김창완 시인 / 깊은 강처럼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누군가가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지난 여름 장마에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싯누런 흙탕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그런데 더 조용히 옛날처럼 있습니다

 

깊은 시름, 깊은 슬픔, 깊은 후회

다 깊은 강처럼 흘러갔으나

 

흘러갔으나 흐르지 않고

거기 그냥 그렇게 있습니다

 

 


 

 

김창완 시인 / 겨울담쟁이

 

 

옷자락 펄럭이며 뛰어다닌 날들 가니

뒤엉킨 헛꿈들이 안간힘 쓴 힘줄들이

벼랑에 매달린 미라들이 이제서야 보인다

 

-《좋은시조》 2023, 여름호

 

 


 

 

김창완 시인 / 나무 시집詩集

 

 

한평생 애오라지 시만 쓰며 사시네

 

허공에 상상으로 길을 내며 뻗어나간

구와 절 잔가지와 행과 연 굵은 가지에

새움 튼 사상의 무리 너울너울 피어나

 

이슬로 맑게 씻어 투명한 에스프리

달빛과 별빛에도 광합성한 작품 모아

올해도 신작 시집을 세상에 상재하니

 

바람은 전율하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비는 울먹이며 나직나직 읊조리고

새들은 모두 외워서 운율 살려 낭송하고

 

그 감동 물결치는 녹음 바다 건너가

황홀히 타오르는 다비茶毘화염 속에다

한 권도 남기지 않고 불살라 버리더니

 

시심이 빈한한 시대엔 차라리 노숙하네

 

계간 『한국시학』 2021년 가을호에서

 

 


 

 

김창완 시인 / 장미

 

 

장미를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참 예쁘다고 말을 했다

장미가 내 말을 들었을까?

못 들었나 보다

돌아서 가려는데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다시 장미를 바라보니

배시시 빨갛게 웃고 있었다

 

 


 

 

김창완 시인 / 아 좋다 말하는데

-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꽃비에 가슴 젖고 실바람에 마음 날려

묵언수행 깜박 잊고 '아 좋다' 말하는데

말벌이 입술에 앉았소?

그래서 돌이 됐소?

 

-《좋은시조》 2023. 여름호

 

 


 

 

김창완 시인 / 호랑이

 

 

동물원에 갔다

호랑이를 보러 갔다

호랑이가 어흥 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호랑이는 하품만 했다

시시해서 돌아서는데

갑자기

커쿠와어루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지에 오줌을 쌌다

망할 놈의 호랑이 어흥 하고 울 줄 알았더니

순 엉터리로 울어서 진짜 놀랐다

 

-《현대시학》 2014년 5월호

 

 


 

 

김창완 시인 / 산속으로 숨은 뜻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온갖 꽃 다퉈 피니 꽃 되자고 열망했소?

열망에 몸이 달아 하필이면 마마꽃을?

곰보가 남부끄러워 산속으로 숨었소?

 

 


 

 

김창완 시인 / 실눈으로 오시다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꽃빛이 눈부셔서 실눈으로 오시다

꽃가지에 부딪혀 혼절해 쓰러졌소?

 

등 밑에 깔린 풀꽃들

어이없다 픽 웃네

 

-《좋은시조》2023. 여름호

 

 


 

김창완 시인

1942년 전남 신안군 출생. 호는 금오(金烏). 광주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 당선, 같은 해 [풀과 별]에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 "반시" 동인. 1980년 [소설문학] 편집장, 1982년 [여원] 편집장, 1989년 [조선일보] 가정조선부장, 1994년 동 기획출판부장 등 역임. 작품에는 <겨울바다> <인동일기> <소금장수의 재주> <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 <나는 너에게 별하나 주고 싶다>. 2011. 제 27회 윤동주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