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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 시인 / 기분 좋은 아침
출근하다 골목길에서 똥누는 아이를 보았다. 엉덩이는 길쪽에 두고 눈은 쪽문 안에서 연탄 가는 엄마의 엉덩이에 두고 손에는 풀빵 한 개 꼬옥 쥐고 똥누고 있는 아이의 복숭아 같은 엉덩짝을 보았다 이른 아침 햇살보다 빛나고 엊저녁 내 꿈보다 강렬한 똥무더기 오늘의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의 출근길 임신중절약, 성병약, 장기매매, 여공구함 그런 말들로 오염된 전봇대와 담모퉁이를 돌아나오면 골목은 끝나고 생각에 깔려 길게 누워 있는 검은 길과 만난다.
김창완 시인 / 깊은 강처럼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누군가가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지난 여름 장마에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싯누런 흙탕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그런데 더 조용히 옛날처럼 있습니다
깊은 시름, 깊은 슬픔, 깊은 후회 다 깊은 강처럼 흘러갔으나
흘러갔으나 흐르지 않고 거기 그냥 그렇게 있습니다
김창완 시인 / 겨울담쟁이
옷자락 펄럭이며 뛰어다닌 날들 가니 뒤엉킨 헛꿈들이 안간힘 쓴 힘줄들이 벼랑에 매달린 미라들이 이제서야 보인다
-《좋은시조》 2023, 여름호
김창완 시인 / 나무 시집詩集
한평생 애오라지 시만 쓰며 사시네
허공에 상상으로 길을 내며 뻗어나간 구와 절 잔가지와 행과 연 굵은 가지에 새움 튼 사상의 무리 너울너울 피어나
이슬로 맑게 씻어 투명한 에스프리 달빛과 별빛에도 광합성한 작품 모아 올해도 신작 시집을 세상에 상재하니
바람은 전율하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비는 울먹이며 나직나직 읊조리고 새들은 모두 외워서 운율 살려 낭송하고
그 감동 물결치는 녹음 바다 건너가 황홀히 타오르는 다비茶毘화염 속에다 한 권도 남기지 않고 불살라 버리더니
시심이 빈한한 시대엔 차라리 노숙하네
계간 『한국시학』 2021년 가을호에서
김창완 시인 / 장미
장미를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참 예쁘다고 말을 했다 장미가 내 말을 들었을까? 못 들었나 보다 돌아서 가려는데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다시 장미를 바라보니 배시시 빨갛게 웃고 있었다
김창완 시인 / 아 좋다 말하는데 -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꽃비에 가슴 젖고 실바람에 마음 날려 묵언수행 깜박 잊고 '아 좋다' 말하는데 말벌이 입술에 앉았소? 그래서 돌이 됐소?
-《좋은시조》 2023. 여름호
김창완 시인 / 호랑이
동물원에 갔다 호랑이를 보러 갔다 호랑이가 어흥 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호랑이는 하품만 했다 시시해서 돌아서는데 갑자기 커쿠와어루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지에 오줌을 쌌다 망할 놈의 호랑이 어흥 하고 울 줄 알았더니 순 엉터리로 울어서 진짜 놀랐다
-《현대시학》 2014년 5월호
김창완 시인 / 산속으로 숨은 뜻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온갖 꽃 다퉈 피니 꽃 되자고 열망했소? 열망에 몸이 달아 하필이면 마마꽃을? 곰보가 남부끄러워 산속으로 숨었소?
김창완 시인 / 실눈으로 오시다 -봄나들이 나온 운주사 돌부처님께 물었다
꽃빛이 눈부셔서 실눈으로 오시다 꽃가지에 부딪혀 혼절해 쓰러졌소?
등 밑에 깔린 풀꽃들 어이없다 픽 웃네
-《좋은시조》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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