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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종국 시인 / 무한 앞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
박종국 시인 / 무한 앞에서

박종국 시인 / 무한 앞에서

그리움이 봄풀 같은 외로움

산다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한없는

쓸쓸한 빛이 꿈을 꾸고 있는

깊이 모를 슬픔이 흔들리지 않는 호수같이

감동 없는 눈빛

겨울 하늘처럼 차갑고 삭막하지만

모든 존재에 몸과 마음을 바친 듯 풀어 놓고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찌들고 주름진 속에 영롱한 구슬을 안고

세월에 속아 사는 엄마의 그늘 같아서

나직나직 불러 보지만 끝내 나타나질 않는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슬픈 눈을 바라보는

눈앞에 숨은 듯 숨지 않은 듯

세상 바깥에서 익혀 가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 말들이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호수 같아 빠지면 죽을 것 같아서

목 매인 송아지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한눈을 파는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바람 한 점 햇살 한 점을 받아먹는 삶만이

귀청이 덜덜 떨리는 현실이라는 생바람 견디느라

끔벅끔벅한 눈 슬픈 눈

우리들 눈 아래 그늘 속에 앉아

유장하게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저 무한 앞에

세계관 인생관 하고 소리 질러 보아야

엄마를 부르는 송아지 울음 만이나 할까

 

-시집 <무한 앞에서>에서

 

 


 

 

박종국 시인 / 가로등

 

 

살다 보면,

세상은 장님이 아니란 걸

세월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안다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행동한 잘못 탓으로

가슴 저미고 뜯기고 나서야

뒤돌아보는 지난날

빤하게 들여다보는 세상이 두렵다

가로등 여린 불빛이 무섭다

감은 눈이 따끔거릴 만큼 죄를 지으며

밤거리에서 만난,

삼킬 듯이 달려드는 네온사인 지나

뒷골목에서 꺼질 듯 빛나는 너의

속살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에

자글자글 매달린 아내의 젖가슴 같은 생이 잡힌다

손에 잡혀 꼼짝 못하는

다 알면서 말하지 않는

눈빛으로 진실을 말한다

새벽까지 단잠 이루지 못하는

너의 눈가,

내린 이슬 속으로 들어가 빛나고 싶은 밤

-시집 <집으로 가는 길> 세계사

 

 


 

 

박종국 시인 / 성당에서

 

 

 스텐인드 글라스를 통해 색으로 바뀐 빛은 신의 영성 그 자체였다. 성당을 하느님 집으로 만들어 놓고는, 영광을 드러내는 듯 오색찬란한 빛은 신을 거부할 수 없는 침묵, 검지에 낀 묵주를 쉴새없이 돌릴 수밖에 없는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황색에 의해 유도된 청자색 속에는 적색과 황색이 들어 있었고 청색에 가까운 주황색 속에는 청색과 적색이 들어 있었다. 녹색은 황색과 청색을 결합해 적색을 유도하고 적색은 무시무시한 공포인 밤의 어둠을 몰아내어 주는 불꽃 같았다. 하늘을 향하는 불꽃 신비스런 색채 중심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한 생각으로 묶어 놓고는 천 가지 만 가지 빛깔로 말을 건넸다. 살아갈 노선에 대하여흙먼지 날리는 신작로에 대하여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에 대하여 빛의 행동인 색깔은 들숨과 날숨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영혼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연금술 같은 힘이 작용하는 그 성당 안에서 나는 신을 거부할 수가 없어 묵주만 돌리고 있었다. 색은 색이 아니라 빛이었다.

 

-시집 <새하얀 거짓말 > 천년의 시작

 

 


 

 

박종국 시인 / 배

 

 

어머니가 사준

꺼먹 고무신 한 켤레

 

그 배를 타고

건너지 못할 강은 없다

 

까맣게 타버린 어머니 속내말고는,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빈집

 

 


 

 

박종국 시인 / 그냥 웃었다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살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매일같이 중얼거리는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몸가짐은 흐트러졌다

누가 나의 내면을 본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을 비틀거리며 내려오는데

누군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소나무였다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반갑다고, 느닷없이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는 다큰 큰아들놈이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이 지났다

냇가 버들가지는 파릇파릇 잎과 눈이 돋아나고

봄을 시샘하는 늦추위가 몇 번 기승을 부렸으나

날들이 지나자 제풀에 힘이 꺾여 물러났다.

가슴에서 번져 나오는 솔향기

헝클어졌던 몸가짐이 부끄러워진

퍼뜩 정신이 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밭갈이를 하다

그냥 웃었다 그놈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2016,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수수꽃 어머니』에서

 

 


 

 

박종국 시인 / 저녁노을

 

 

말없이 멀어져 간

뒷모습 대신 뒷모습이 있던 자리

그 곳을 물들이는 것이 노을 아닐까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말이 아닌 마음으로 외치는

강물 가득히 그리고 하늘과 구름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잎 사이에

뒷모습이 있던 자리라면

어디든지 물들여 놓고는

잠시 밀어놓았던 것들을

무엇인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되돌려 놓고는 붉게 태우는 것은 아닐까

 

쭈빗쭈빗한 논둑의 마른풀이

논물에 그림자를 내리고 있는

논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나무 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는

꼬리질을 하며 엉덩이에 붙은 파리를 쫓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있던 자리에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색깔 속에

더 이상 물들일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느낄 수 없을 때까지

 

 


 

 

<동시>

박종국 시인 / 엄마가 보고 싶다

 

 

눈시울 닦으며

울 엄마가 보고 싶다

 

너무 아파

멀리 병원에 갔는데

할머니는

돈 많이 벌어

올 거라고

 

엄마~

오늘도

빈 메아리만 울릴 뿐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면

어이 올까

날짜만 자꾸 가는데

할머니가 밉다

 

눈물이 주르륵

울 엄마가 보고 싶다

 

 


 

박종국 시인

1948년 충북 괴산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집으로 가는 길』 『하염없이 붉은 말』 『새하얀 거짓말』 『누가 흔들고 있을까』 『숨비소리』. 2015년 조지훈문학상, 2016년 시작문학상 수상. (주)대원색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