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기성 시인 / 감자가 없는 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
이기성 시인 / 감자가 없는 시

이기성 시인 / 감자가 없는 시

 

 

 감자가 없는 시에 감자가 없다고 말하면, 그건 어떤 고백일까요? 당신이 종일 손에 쥐고 있던 게 감자가 아니고 주머니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그것이 결코 감자가 아니라면?

 

 그건 뼈아픈 시절의 농담과 같을까요? 어느 봄날에 잃어버린 사상과 같을까요? 당신은 얼어붙은 눈을 감았는데 질끈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것이 감자가 아니고 감자의 둥그런 얼굴이 아니고 그러므로 이 시는 감자가 없는 시가 아니고

 

 한없이 무료한 한낮의 감자와 뜨거운 감자의 연인들은 어디로 갔나요? 불면증에 걸린 감자처럼 몸을 뒤채다 눈 감으면 여기는 어디일까요? 자욱한 잠이 한창 피어나다 문득 눈을 뜬 늙은 감자처럼

 

 커다란 잠의 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져 제멋대로 굴러가는 저것은 또 무엇인가요? 이 시는 결국 감자가 없는 시가 아니고, 탄식처럼 당신의 목에 걸려 컥컥거리며 넘어가지 않는 그것이 감자가 아니라면,

 

 


 

 

이기성 시인 / 생일

 

 

오래된 거울이었는데, 이상하지

나는 구름이 된다

언니는 낡은 연애소설을 읽고

나는 벌써 뚱뚱하게 부푼 거품이 되었어

더운 오줌이 바지를 다 적실 것처럼 흘러

따듯한 언니라고 부르며 언니의 커다란 젖가슴을 흘러내리면서

작은 애들처럼 따듯하게 구운 감자를 먹고

함께 매를 먹고 차가운 물에 천천히 잠길 때

얼굴이 검은 언니는 거울을 보듯 나를 들여다보고

수초의 녹색 손가락을 벌려 목을 휘감는다

허벅지에 젖은 속옷을 둘둘 감고 언니는

좌판에 쭈그리고 앉은 가난뱅이처럼

검은 연애소설을 읽고 또 읽는다

누런 비린내를 담요처럼 덮어쓴 언니

하염없이 졸고 있는 최초의 언니

십년 후에 문득 다정한 언니라고 부르며

젖은 머리카럭처럼 검게 흘러내리면

발이 커다랗고 입술이 비틀린 언니는

말끔하고 하얘질 것 같다

모르는 언니의 입김이 내 눈에서 얼어붙고

오래된 납의 거울 속 사라진 애들이 발견될 것 같다

 

 


 

 

이기성 시인 / 타일의 모든 것

 

 

그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고 타일이라고 부른다, 타일은 흰 접시를 두들기고

침을 흘리고 양탄자에 오줌을 싼다, 아파트에 들일 수 없는 더러운 짐승

타일은 쿵쿵 고요한 이웃을 깨우고, 발을 구르고 비상벨을 울리고

좁은 계단으로 도망친다, 우리는 모두 타일을 사랑해

그러나 지붕으로 달아난 타일은 커다랗게 부풀고

삑삑 사방에서 경적이 울고, 타일들이 모두 깨어나 노래를 부르는 밤

벌어진 입속에서 푸른 타일 쏟아지는 밤

검은 자루를 질질 끌고

한밤의 피크닉을 떠나는 가족들, 타일을 안고

돌아가는 창백한 독신자들

타일 속에 숨어 헐떡거리는 공원의 소년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화가 난 여자들

자, 타일을 마구 두드리는 밤이다

우르르우르르

뜨거운 침과 함께

푸르고 총총한 타일 조각들

머리 위로 쏟아진다

 

 


 

 

이기성 시인 / 자장가

 

 

 어두운 대지에 얼굴을 파묻기 위해 차가운 지붕 아래로 흘러내리는 밤, 그걸 두꺼운 담요처럼 덮고 누워 난 오직 하나만을 기억해. 이를테면 단식하는 개들, 개들의 뜨거운 이빨과 허공의 외투를 껴입은 슬픔의 최적량, 그리고 지하도에 누운 늙은 왕의 귓바퀴를 흐르던 마지막 눈물. 오늘 밤을 지나 검은 쥐들은 얼어붙은 강물 위를 달려가고 토할 때까지 꺽꺽 울다가 사라지는 발자국들. 얘야, 입을 다물렴, 누군가 등을 어루만지면 조금 추위를 느낄 수도 있지. 불멸의 잠은 한없이 포근하고 개들의 벌어진 입을 스치는 먼 바람, 고요의 목구멍에 쌓이는 희고 푸른 재. 슬픔을 모르는 늙은 왕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따뜻한 오줌이 흘러나와

 

 


 

 

이기성 시인 / 재단사의 노래

 

 

가수여, 당신의 노래를 어디에서 가져오나요?

깨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처럼 적막한 목소리를

 

1970년에 그는 재단사였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옷을 짓기 위해 목소리를 버렸지요.

누가 검게 그을린 그 목소리를 주워 갔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1970년을 모르고,

그건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겠지만,

노래는 일 년 후에도 삼십 년 후에도 아스팔트 위를 굴러다닐까요?

화염의 구멍이 별처럼 숭숭 뚫린 외투와 같은 노래는

 

검게 타버린 슬픔과 슬픔의 아이들이 하얀 팔을 뻗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저녁

 

골목의 지하방에는 슬픔의 재단사들이 잠들어 있어요.

그들은 밤새 은 빛 가위로 밤을 오려 가장 검은 외투를 만들었답니다.

당신의 것이 될 외투를 재단하느라 부르튼 손으로

딱딱하게 굳은 세월의 심장을 어루만지며

 

파란 슬리퍼를 신은 뚱뚱한 가수여

오늘은 그것을 어디로 가져가나요?

 

지난밤의 별빛과 겨울의 입김과자정의 촛불로 지은

늙은 재단사의 외투를 입은 노래를

 

 


 

 

이기성 시인 / 포옹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안는다

흰 도화지 같은 공중에

너의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

주르륵 녹아 흐르는 입을 다시 그려줄게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파란 입술 그려줄게

 

비의 하얀 팔들은 어디로 가서

낯선 얼굴 어루만지는지, 어디로 날아가

검고 차가운 목덜미를 감싸며 흩어지는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다는 듯

주황색 포클레인이 우뚝 멈춰 있다.

부서진 옥상 위

아이의 슬리퍼가 고요히 젖고 있다

 

비의 팔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가는지

퍼붓는 빗속에서 아이는

하염없이 입을 벌리고 걸어간다

 

 


 

 

이기성 시인 / 종이

 

 

 그가 죽자 평평하고 납작해졌다. 종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을 입에 넣는다. 커다란 호주머니 속에는 달고 진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환하고 단 것들 뒤에는 도무지 뭐가 있을까.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그는 단 것에 대해 쓴 적은 없지만, 그것은 바스라진 채 종이 위에서 굴러다닐 것이다, 검고 못생긴 것이 끈적끈적 이빨에 달라붙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단맛 속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나가는 어린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연민과 증오를 차 례로 배워갔더라면

 

 결국 남은 건 이토록 모호한 단맛뿐이라고, 그는 한숨지었다. 여전히 햇빛이 따갑고 그의 혀에 남은 것이 검은 글자가 아니라 단맛 이었으면, 그리고 그건 시를 읽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기성 시인 /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

 

 

가등의 그림자 어두운 길 한쪽 무심히 비추고 있다.

조금전 사내의 차가 쿵 하며 벽돌담을 들이박았고

아직 말끔히 닦여지지 않은 끈적한 흔적은

사내의 머릿속을 채운 채 응고되었던

권태가 허공으로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담배연기가 산발하며 흩어지듯

그도 길의 끝까지

달려가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스펀지를 두드리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가 박살났을 때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무성한 숲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

헤치고 검은 살쾡이 한 마리

번개처럼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견인차가 끌고 가는 차의 번호판을

무심히 읽으며 길가의 은행나무는

그가 마지막 부른 이름을

무성한 노란잎으로 바꾸어 달고 있다.

 

 


 

이기성(李起聖) 시인

1966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와 동대학원 졸업. 1998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2015년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