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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병순 시인 / 가을이 짙어가면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4.
박병순 시인 / 가을이 짙어가면

박병순 시인 / 가을이 짙어가면

 

 

우물가 감나무에 더런 감이 발갛게 익어 가고,

아직도 뜨락엔 장미가 볼 붉히고,

 

푸르른 하늘에 흰구름 한 점 두웅 한가롭다.

 

허전했던 가슴에 기쁨이 와 철렁여도,

슬픔은 슬픔대로 물거품처럼 떠오르고,

낮달이 종이배 되어 이 안을 안고 간다.

 

차츰 가을은 짙어 가는데 가을에 깊이 젖지 못함은,

이 고동 설레임 아닌 불안과 초조에 떪이런가?

언제나 마음의 고요를 얻어 여유론 세월 누릴꼬.

 

철따라 제비 떼 떼지어 남으로 가면,

기러기 목을 뽑아 날아들 오련만,

내 속에 자리한 욕망이란 샌 가도 오도 못하나!

 

 


 

 

박병순 시인 / 감자를 긁으며

 

 

아내가 함지를 담근 감자를 깍으라 한다

난 제일 닳은 수저로 감자를 닥닥 굵으며,

함박에 그득한 감자를 긁던 어머니를 본다.

 

더러는 작은어머니 누이동생 모습도 보이고,

버리쌀 위 쌀을 얹고 그 위에 감자를 부어 찐,

드북히 보리밥상 먼저 내놓던 희부연 감자 사발!

 

김모락모락 오르는 감잘 젓가락에 찍어 불며 먹던,

그 포근포근한 맛 지금도 달가와서,

어머니 누이동생 작은엄마 환상 그려 감잘 긁다.

 

 


 

 

박병순 시인 / 이별 4

 

 

이별도 여러 가지다 사람과의 생사 이별......

아낙의 남편에 비긴 바늘과의 애달픈 이별

남정의 심혈과 숨결이 스민 책과의 애돌한 이별도.

 

수만 장서를 갈몰만한 넉넉한 공간이 없어,

갑자기 대학 도서관에 너를 넘긴 침통한 밤이여!

만인의 영원한 빛이 될 자릴지라도 슬픔은.....

 

사서계장님 동료와 학생 열여덟을 거느리고,

아침아홉시 반서 하오 네 시 반까지 걸려,

옮겨간 내 생명의 분신들의 애절한 절규에 궐 막는다.

 

못난놈! 어떻게 고생 고생 힘겹게 모은 책들인데,

평생 정든 책을 불시에 넘겨 줄 수 있단 말인가!

허탈코 허전한 가슴을 안고 몸부림치는 나날이여!

 

울어 보아도 불러 보아도 이젠 할 수 없는 일이다.

도서목록이 되고 도서분류가 이뤄져,

구름재 서재의 기능이 발휘돼 서권기 넘치길 빌고 빈다.

 

이별은 하였으되 인연이 끝난 건 아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에 더 채우고 갖추어서,

이룩된 서권의 갈피갈피를 넋은 나비 되어 날리라.

 

 


 

 

박병순 시인 / 마음의 구멍

 

 

발 괴는 베갯잇 빨아 달라 하였더니,

한 주일 넘도록 되돌아오지 않아,

세탁기 돌린 쪽은 빨래 걷은 쪽에 물으란다.

 

달포가 넘어서도 베갯잇은 간 델 모른다.

세탁기 구멍 뚫렸나 창 안 빨래 바람에 날렸나?

마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고 마음의 구멍 뚫렸다.

 

 


 

 

박병순 시인 / 반영월식

 

 

털을 숨긴 짐승의 잠버릇은 고약하다

뜬눈으로 밤을 샌다

흥망에 걸린 별들이 심하게 퍼덕인다

어떤 물고기가 탈출을 시도하다 저리 많이

비늘을 다쳤을까

저곳에서 옷을 벗은 물고기는 얼마나 아팠을까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새는 한통속

사랑도 어둠에 녹는다는 것이 더는 비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낯익은

거뭇한 날들이 겨드랑이에서 자랐다

날개를 들키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털을 길렀던

천사의 혈통은 지금도 궁금하다

감쪽같이 그물망을 통과하는 방법에 골똘한

새들의 조상은 암수 구분이 모호했다

남자들은 왜 날개를 달지 못한 걸까

천사를 만난 후

내 몸의 털은 숨어 자랐다

새벽 강 그물망에 걸린 것은 날개가 짧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를 삼키고 비상한 새

달을 쪼아 먹다 반쯤 남기고 사라졌다

 

지난 밤 보름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병순 시인 / 알키투더스* 추모기

 

 

반듯한 막대기에 집착했던 쿡 선장은 대왕오징어였다

 

전생에 팔비신장이기도 하였던 그는 여러 개의 다리로

새벽시장 골목을 헤엄쳐 다니며 빈병이나 폐지 등을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구멍가게 여주인에게

멱살 잡혀 패대기질 당하고 꾸물꾸물 사라졌네

그날 이후 대왕오징어는 가운데 다리가 없을 거라

결론 내린 사람들이 해장국 삼아 그를 끓여

먹었다고도 하네 한번은 심해에 숨어 사는 뼈 없는 종족

훔쳐보고 싶었던 몇몇 사람들이 술병 깊숙이

고성능 레이더를 내려 보내 대왕오징어의 동태를 살폈다네

새벽이 되어서야 레이더망에 부표 크기의 동그란 입만 달랑 포착되어

쿡 선장은 무골이다 투명인간이다,

시장통 하수관으로 괴상한 소문이 흘렀다고도 하네

그의 집은 언제나 불빛 없는 깊고 깊은 바다

허기진 저녁이면 수족 같은 오징어를 잡아먹고

온몸에 이상한 광채를 껌벅이곤 하였는데 아무도 빛의

진원을 알지 못했네

‘향유고래의 뱃속에서 알 수 없는 발광체의 다리가 발견되다’라는

토픽이 실린 날 여느 날과 달리 불빛 환한 그의 집,

환상통 철각이 차르륵 차르륵 언제 저 많은 발소리를 허공에 매단 걸까

뼈 없는 종족, 웅크린 청마루가 수막처럼 갈라지네

 

발굴된 족적, 만월이 흡반처럼 추적 중이네

 

* 전설 속의 대왕오징어.

 

 


 

 

박병순 시인 / 책

 

 

헐벗고 굶주려 모은 소중한 수만 권 책이,

 

이제는 짐이 되어 운신조차 어려운데,

평수를 줄여야 할 운명이니 이를 장차 어쩔고?

 

책이 힘이자 생명이자 종교였는데,

그 굳게 믿던 희망과 보람의 성벽 무너지는가!

장서를 넉넉히 늘어놓고 법열할 날 언제뇨?

 

자식에 미뤄 주자니 또한 그에게 짐이 되고,

 

남에게 주는 건 헛짓 증정도 그리 만만찮은데,

낙향해 꾸린 책짐을 펼칠 수 없음 자못 막막쿠나!

 

세상에 이런 신세 어디 또 있을까?

하늘 보고 땅을 봐도 호소할 곳 망연하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굶(구멍)있단 말도 헛거로고.

 

이리 되작 저리 되작 곰곰이 생각는다.

엎치락뒤치락 몸살난 듯 발광일다.

해돋이 해넘이를 꿈에라도 가슴 열어 환희한다.

 

그리 좋은 책이 짐 되어 원수 될 줄 알았던가?

밀릴대로 밀리다가 망할 때 망할망정.

아직은 서권기 속에 황홀한 삶 누리자.

 

금보다 귀한 것은 책 위에 더 있는가!

사람 재는 잣대도 책 아니고 어니 헤리?

혼령도 호랑나비 되어 책갈피를 감돌리라.

 

 


 

 

박병순 시인 / 해넘이의 노래

-해돋이로 살고파라

 

 

서녘 하늘 넘는 해가 영창 휘황 되비췰러니,

황홀히 일렁이다 벌겇게 달아 올라서,

애달아 숲에 얼굴 묻었다가 정적 가쁜 숨 덜컥 진다.

 

해돋이 그 밖에는 모르고 살아온 낼러니,

올 들어 저절로 깨치게 된 해넘이의 뜻,

 

해넘이 해넘이의 몸부림을 이제 어렴풋 알리로다.

 

해는 오늘 금방 져도 내일 또 해돋이로 뜨련만,

사람은 한 번 지면 어둠 속 몇 겁을 헤멜런가

인생도 해넘이가 해돋이로 영원으로 살고파라.

 

 


 

 

박병순 시인 / 항구

 

 

어느 항구로부터 나와 어느 항구로 향하는 배뇨?

하늘도 수평도 아니 보이는 푸름을 잃은 바다……

나침도 기관도 헛되이 너울대는 한낱 허울.

 

물밑을 자맥질하여 몇 억만 리를 헤매었는지?

수렁속 같은 바다밑을 몇 겁을 두고 헤맸는지?

저 저기 가몰가몰 떠오르는 등대처럼 불빛 하나.

 

얼마 만한 깊이에서 어찌 용케 떠올랐는지?

아몰거리던 세상이 또 다시 천천히 열리고,

기능을 잃었던 선체에도 미온이 돌기 시작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콩알 만한 힘이 솟아나,

고 콩알 만한 힘으로 하여 온 몸을 가누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란 이렇게도 미미하고 신비론 것.

 

어느 항구로부터 나와 어느 항구로 향하는 배뇨?

하늘도 수평도 파도로 술렁이는 망망한 바다……

정상을 찾아 출항을 챙기는 공포에 떠는 새벽 항구.

 

 


 

 

박병순 시인 / 새눈 새맘으로 세상을 보자

 

 

나완 인연이 아주 멀던 창 너머 바깥 풍경이,

곱디 곤 아침 햇살 타고 환하게 드러나는구나 !

빠알간 양옥도 나란히 앉은 못등도 새롭고도 정다와라.

 

기린봉 넘는 한 떨기 구름 정말 깨끗이 피어나고,

버드나무 실가지에 감기는 바람 진정 곰살갑다.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온통 눈물겹고 눈부셔라.

 

어디서 오는 경이와 벅찬 감격과 법열이냐?

오늘 따라 완산 야경이 유난히도 아름다움은,

승화된 이 가슴의 탓이려니 새 눈 새 맘으로 세상보자.

 

새 눈으로 자연을 보고 새 맘으로 세상을 보며,

추한 것과 약한 것은 아예 거떠보지도 말고,

어질고 착하고 맑고 곱게만 이 세상을 살자

 

 


 

박병순(朴炳淳) 시인 (1917년-2008년)

1917년 전북 진안군 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전북대 대학원 국문학과 이수. 논문 ‘현대 시조의 한 고찰’로 문학석사학위. 전주사범 부속 국민학교 교사. 전주 남중·전주 상고·전주고·남원 농고·이리 공고·전주 공고· 진안 농고·전주 여상고·전라고·임실고 교사. 중앙대, 한성대, 한양대 강사.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제3회 노산 문학상. 황산 시조 문학상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