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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와 시인 / 본성으로 가는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4.
이기와 시인 / 본성으로 가는 길

이기와 시인 / 본성으로 가는 길

 

 

걸어도 걸어도

발이 집에 닿지 않는다

 

잠을 벗어 두고 걸어왔는데

집이 더 멀어진다

 

모래산을 넘어 온 지 오래인데

강을 건너 온 지 오래인데

 

여긴가 싶은데

걷다 늙어버렸다

 

집에 가기 힘들다

 

 


 

 

이기와 시인 / 안목(眼目)

 

 

새를 보았다

저녁을 이끌고 청산을 넘어가는 새

한 마리의 새

 

새를 보았다

저녁을 이끌고 청산을 넘어가는 새를 뒤따르는 새

두 마리의 새

 

다행이다

하나와 그 외의 하나가 아닌

둘이어서

한 쌍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외롭지 않게 되어서

 

순간의 안쪽에서 영원을 포착하기 위해

나는 더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기와 시인 / 유토피아' 정마담의 하루 7

-해가 뜨지 않는 변두리에서의 한때

 

 

연탄불이 꺼질 것 같아 아궁이 밑구멍을 활짝 열어두고

아랫동네 질퍽한 시장바닥을 휘젓다 와보니

 

이게 웬 걸,

 

그새 다 타버리고 흰 잿덩이로 앉아 있는 해골 두 장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

 

내 영혼이 홀딱 타버리고 쓸모 없는 구공탄 잿덩이가 된 것

한동안 분별 없이 화력 좋은 몸의 밑구멍을 활짝 열어 둔 탓

 

 


 

 

이기와 시인 / 어죽

 

 

뼈와 살을 풀어 뭇 백성 먹이는

어죽을 앞에 놓고

부끄러워라

쌀 한 톨이 짊어진 무게를 모르는 혀로

어질어 눈물마저 안개빛처럼 뽀얀

살신殺身의 덕을 공으로 받아넘기려 하니

비속하여라

 

식욕이 육신을 떠나지 못하고 붙드는

화천 강변의 저녁

목숨의 길은 북한강 줄기보다 길게 뻗어

누치 꺽지 배가사리가 산란한

생각의 급류를 지나

산천어가 방황했던 두물머리의 기억까지 휘돌아

 

맞이하는 뜨거운 숨 한 숟가락

백골이 난망이어라

우거지 부추 버섯 된장 들깨가 깃든 맛 속

어디에도 물고기의 흔적은 없어

오로지 물씬 풍기는 건 세속에서는 먼 저쪽

곡운구곡*오지의 깊고 푸른 냄새

 

어디가 끝이런가

만수산 계절이 피고 지듯 물고기의 몸을 받아

다른 무엇의 몸으로 건너가기 위한

뚝배기 한 그릇의 회귀

 

어죽 집 유리창에 붙들린 명자나무는

이전 누구의 장엄한 몸을 요기했기에

저리 붉은 꽃을 저물녘 홍등처럼 밝혀 드는가

 

*곡운구곡(谷雲九曲):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의 용담리와 삼일리 등에 거쳐서 위치한 계곡.

 

 


 

 

이기와 시인 / 길다방 송양

 

 

길다방 송양을 아시나요?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를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돌아나가는 시골길처럼

알다가도 모를 그녀 말이에요

누구든 따뜻한 봄바람을 주문하면

스쿠터를 타고 신속 배달해 주는,

돌멩이보다 잘 굴러다니는 그녀 있잖아요

각설탕처럼 프리마처럼 살살 애간장 녹이는

웃음 헤픈 그녀를 모르세요?

화려한 겉포장보다 내용이 궁금할 때

더러는 티켓을 받고 대여해주기도 하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철새처럼

산간벽지 이곳저곳 지도 그리며 날아다니는

알고 보면 딱한 여자지요

보온병 보자기를 한 손에 들고

간혹 공장의 담벼락이나 면사무소 앞에

정류장 표지판처럼 우두커니 꽂혀 있는

그러다 덜컥 막차를 타고

야심한 기억 너머로 잠적해버리는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락 공판날이 되면

어디서 밥이나 먹고 사는지 불현듯 궁금하게 만드는

꼭 어릴 적 헤어진 누이 같은

길다방 송양을 당신도 아시나요?

 

 


 

 

이기와 시인 / 칼의 공식

 

 

칼을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빈틈없이

아니다, 계절은 없다

생명이 살해된 마당에 마른 목을 접고 앉아

숫돌에 응징의 칼을 가는 자에게 계절은 없다

 

분노의 울렁임을 칼날이 알아듣도록

저주의 소름을 칼날이 흡수하도록

바람이 구름을 내몰 듯 침묵의 변방에 꿇어앉아

분노의 윤곽이 유리꽃병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응어리진 칼을 간다

 

꽃꽂이를 하듯 손을 델 수도

물을 갈아 줄 수도 없는

멍빛 눈물로 깊어진 분노의 심층에서

안쪽 날을 갈다 보면 칼날이 바깥으로 눕는다

 

분노는 중심을 지킬 때 예리한 법

칼 가는 그를 옹호하듯 등 뒤에서 복사꽃 핀다

분노의 집중과 분산에 따라 칼날이 섰다가도 눕는다

칼날은 섰다가 눕기를 반복하면서

나이가 차고 세월을 먹는다

갈고 갈다 어느 날 안팎이 닳아 칼등만 남은 칼

칼등마저 갈고 나면

어느 새벽 칼은 없다

 

그는 쉬지 않고 칼을 간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칼을 허물었던 것

 

응징이 자기한테로 향해 칼집에 꽃을 꽂게 하기도 한다

 

 


 

 

이기와 시인 / 하릴없이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이기와 시인

1968년 서울 출생. 중앙대 대학원 졸업.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그녀들 비탈에 서다』 『나봄』 『쉬고 또 쉬어라』. 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 『비구니 산사 가는 길』.. 현재 강원도 화천 한적한 숲속에서 나봄명상상예술학교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