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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 시인 / 해바라기 요양원
덩굴이 붙잡고 있는 요양원 창문이 스르르 열리고 젖니가 가려운 효자손은 그의 늙은 배다른 동생처럼 낯설고 누구하고나 비슷하게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얼굴빛이 누렇고 팔다리는 가늘어져서 눈으로 말하는 아직 해바라기가 붙들고 있는 푸석하고 마른 웃음 말하지 않은 분노와 떨어뜨린 치욕을 알약처럼 줍고 잠들기 전에는 몸에 착 붙어서 내 곁을 떠나지 말라고 이 세상 아이가 아닌 웅석을 담요보다 따뜻한 기도로 앞서 누운 모든 어른아이들이 노오란 똥을 흘리고서 장난감을 잃어버린 시간처럼 혼자서 울고 있는 마르고 여위는 그늘을 오래 오려내고 있는 해바라기
혀가 붉은 새들은 날개가 부러진 침대로 날아오고 회색 점박이 무늬가 뜨뜻한 알을 오래오래 품고 다 풀어내지 못한 두루마리 화장지의 말랑한 표정은 돌보지 못하는 벽시계를 닮아가고 있다
-월간 《현대시》 2023년 8월호, '신작특집에서
이기인 시인 / 강아지
날아간 공을 기웃거리는 꽃나무 아래 오늘의 강아지 예감을 데리고 놀아요 언젠가 당신이 데리고 온 이름을 물어요 공을 좋아하는 사람의 농담은 공처럼 땅을 짚고 휘어지는 구면의 병명을 알아보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거리까지 굴러가보는 공을 붙잡으려고 강아지는 종소리로 울어요 모르는 말을 꺼내려고요 일어나요 공과 놀이를 바라보면 나도 좋아할래 저녁에는 공의 이야기를 강아지처럼 꽃나무 곁에 한마리 골똘히 내려놓아요 열어놓은 밥그릇을 들여다보아요 어떤 영혼의 꼬리는 장난을 싫어해요 두마리의 허공과 비슷한 강아지를 풀어요 오늘의 예감은 즐거워서 발이 더러워요
이기인 시인 / 생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빗소리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하는 미련의 저녁 문밖의 빗소리 출렁출렁 귀로 넘치고 오래된 둑을 무너뜨리고 못생긴 돌멩이와 땅에 박힌 나무뿌리를 뽑아가지고 어데로 간다고 출렁출렁 비가 온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프고 아프다고 돌멩이와 나무뿌리가 뽑혀서 질질 끌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먼 데 사는 이의 짐이 많이 젖을까 싶어 텔레비전 화면을 들었을 때 비 맞은 현대식 건물에서 정규직이 아닌 이들이 와르르 어데로 가라고 빗물처럼 쏠려나오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빗소리가 이상하게 내 집 지붕 위로도 떨어진다 울음소리와 신음소리와 웃음소리의 구별이 힘들어진 늦은 저녁 빗소리 밤새 차가운 지붕을 둥둥 두드린다 마른 눈동자의 정규직 아닌 이들이 나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빗소리에서 잠이 또 깼다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에서
이기인 시인 / 봄비
공장 마당에 혼자인 나무, 작업복에 붉은 물방울이 튄다
나는 언제 울면서 애기할 수 있는가 내 눈물은 참았던 일이 많아서 한꺼번에 쏟아질 것이다
그날은 소주 한잔 사달라는 사람 있거든 술 한잔 사주고 손수건도 내주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도 까먹지 말아라
빗방울 소리 저녁 늦게까지 저벅저벅 집으로 오고 우산도 없이 걷는다는 게 말이냐, 우산도 없다는 게 말이냐
봄비 오시는 날 비 맞은 소녀 애인 옷잘 다려서 못에 걸어놓고 다리미 세워놓고
엊그제부터 생리대에 쏟아진 피와 만나서 온종일, 찐 감자처럼 이 저녁이 배고픈 사람을 기다린다
이기인 시인 / 소녀의 곰인형
사진을 찍으려고 곰인형 가족이 모였네, 좀더 바짝 붙어봐요 그래도 가족인데 바짝 붙어봐요 외로울 맨 곰인형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어주는 곰인형 가족의 막내 곰과 잔다, 곰과 일어난다, 곰과 학원 간다 화장실 가서 한대 피우고 몽롱하게 교복을 벗고 청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탄다
모든 남자는 소녀를 사랑한다 그와 있는 곰을 귀여워 한다 순환하는 그 전철이 흘러가고 있을 때 구닥다리가 ㄴ자로 앉아 신문을 펴고 어제 일을 꼼꼼히 챙긴다, 그 다음 페이지로 그 다음 페이지로 사건은 넘어간다
이기인 시인 / 물의 뚜껑
약수터에 물 뜨리 가다 오래된 소년원의 철조망으로 나필꽃이 기어올리가는 것을 봤다 저 높은 곳에서 나팔꽃을 내려다보는 이는 소년을 감시하고 있다
자꾸 올라가기만 하는 나팔꽃이 물 뜨러 가는 내 마음을 출렁이게한 후, 흰 물통의 뚜껑이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샘 같은 세월이 흘러나온 것을 알았다 담벼락에 기대어 오랫동안 울고 있는 나무는 그동안 나와 소년을 닮았을 것이다
나는 미안하지만, 소년의 나이를 물었다 소년은 이렇게 화창한 날 어디 가냐고 물었다 나무 줄기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이 다 소풍을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이 보고 있는 소풍을 중지시킬 수도 없었다 나는 물 뜨러 간다, 너는 여기서 멀리까지 뿌리를 뻗어야 한다 갑자기 참새가 날아와 나뭇가지 속으로 숨어들었다
갑자기 소낙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팔꽃 모가지가 기웃 떨어졌다 내가 흔 물통을 들고 막 뛰어가는 세월은 0년이었다. 수감되어 있는 소년에겐 빗소리만 들렸을 것이다
이렇게 비가오는 날 형량을 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하늘의 노염을 사서 나 무르이 뚜껑을 잃어버렸다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에서
이기인 시인 / 사과
벌레는 읽던 페이지를 잃어버렸다
과도로 해부한 사과의 내부를 보고서야
사랑 이야기는 여덟조각으로 흩어졌다
외로운 뺨이 한접시 있다
이기인 시인 / 동그라미 달력
분홍거미줄 같은 것이라고 어떤 마음이 잡아서 뜯어내고 혀가 말려들어가는 벽을 일구는 것 같아 숨은 달력을 평평하게 다듬어지는 숫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저녁의 넓이로 숨구멍을 닮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이상하고 기이한 몸서리 부표 흙으로 돌아오고 싶은 기념일 의자에 묶어 놓은 풍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다 피곤해지는 습관으로 눈을 찡그리는 안경을 벗고서 보는 옷 입은 숫자들 아름다운 날은 언제 또 물방울을 넣어둔 벽은 나비를 흘리고 리본을 낳고 하얀 손을 잡은 꽃이 사월의 창으로 늘어지고 허물어지고
-시집 <혼자인 걸 못 견디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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