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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진경 시인 / 소리가 온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4.
정진경 시인 / 소리가 온다

정진경 시인 / 소리가 온다

 

 

 전원을 끄고

 코드란 코드를 벽에서 뽑는다

 내 속의 이명을 키운다

 

 은폐된 소리를 도굴한다 부장품처럼 견딘 소리뼈, 내 몸을 찌르는 귀무덤 도굴한다 무심한 역사의 등뒤에서 자란 이명들 세월을 물레질하는 달팽이관 없는 귀, 임란 중에 끌려간 도공들 한숨을 판다 연처럼 날아오르는 염불, 삼중 스님 독경이 하늘을 판다 발굴된 소리는 연줄에 먹인 사금파리가 된다 시간의 작두날을 타고 춤추는 살풀이 굿판에서 천지신명 귀 잘린 원혼들, 소리가 세상을 쓰윽 벤다 닳지 못한 생살의 울음잡기를 한다

 한 동맥 줄기로 흐르기 위한 끝없는 망치질 소리, 움츠려 드는 나를 두드린다

 

 소리가 밟고 간 자리마다

 흥건히

 귀무덤 쌓인다

 

 


 

 

정진경 시인 / 굴욕의 신념

 

 

몸을 가눌 데 없어 땅으로 누운

선인장 화분을 역방향으로 돌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인장은

제 몸을45˚로 일으켜 지탱하더니

어느 날은 태양을 응시하며

반대로 기울어져 있다

 

제 삶을 함부로 손댄 나에게 선인장은

굴욕을 느낀 것 같다

선인장은 그저 제 피에 흐르는 유전자대로

사막이 아닌 도시에서도 맹렬히 살아온 것뿐인데

내 잣대로 선인장을 간섭한 것이다

 

굴욕이 만들어내는 몸 형상이 좋아

선인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여겨 지켜본다

태양을 향해서라면 기꺼이

제 몸을 구부리는 선인장 신념이

내 생을 굴욕으로 만든 기억마저 같이 구부린다

 

기형인 선인장 몸은

생을 힘겹게 고민한 흔적이지 장애가 아니야!

스스로를 지탱하려고 용을 쓰는

선인장에게 나는 파이팅을 외친다

 

유연하게 등뼈를 휘고 있는 선인장

가시 돋은 꽃들이 빨갛게 웃는다

 

-시집 『여우비 간다』 2013년 푸른사상

 

 


 

 

정진경 시인 / 편의점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묻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아니더라도

죽을 수 있는 것들

일회용품들이 편의점 쓰레기통에 쌓여 간다

암묵적으로 허용된 죄목은 법전이 아니라

매립지에 기록되어 있다

 

편의점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가는 길을 묻는다

 

죄 있는 사람들만 갈 거라는 고정관념

형무소로 가는 길은 네비게이션도 대답을 않는다

교도소 회랑을 따라 나열되어 있는

수 십 년 묵은 슬픔이 감염될 때에야 어렴풋이 스치는 길

식욕이 저지른 죄의 수확물

선악과나무 꼭지에서 돋아나는 생명의 무한성이

죄의 근원지라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이 유죄이든 무죄이든

죄는 식욕을 줄기로 양분을 섭취 한다

여자를 '맛있겠다' 로 표현하는 남자들

언어 속에 내포된 성희롱죄

타인을 삼키고자 하는 욕망은

식욕에서 뻗어나간 가지에 난 무성한 잎들이다

 

잠금장치가 없는 식욕에 성업 중인

음식점 간판들

알고 보면 식당으로 가는 길도

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정진경 시인 / 방생

 

 

 방생할 때가 됐다

 등껍질에 머리를 넣는 습성은

 이제, 버려야 한다

 

 광택나는 집기 속에서 그녀 보석처럼 놓여 있다 국경일마다 풀려 나오는 죄수들 머리칼에서 일어서던 위기의식, 일상의 무료한 멘트가 텔레비전 화면 위에 쌓인다 좁은 서랍장 안 내의처럼 웅크리고 있던 등이 굳어간다 도미노 게임 하듯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녀 책들, 닦지 않는 집기 위에서는 이제 시간이 쌓인다 일상의 이야기들은 그녀 문 밖에서 돈다 한 폭의 정물화로 걸려 있는 그녀, 달팽이 등어리로 시간이 또아리 튼다

 

 먼지들이 갓털로 날아오른다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남은

 어느 오후

 껍질이 터져야 씨앗이 보이는 방

 그녀는 그녀를 방생한다

 

 


 

 

정진경 시인 / 몸은 통제구역을 벗으면서 자란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쿵쾅거리는 개

강아지용 목줄이 채워져 있다

목줄이 허용한 공간 밖으로 자라난 살들이

불가사리가 되어 바다로 향하고 있다

 

존재를 통제당하는 마음, 형상이 저럴 것이다

 

무언가를 옥죄어 놓고

성장을 하라는 말은 감언이설이다

몸을 통제 수단으로 삼는 할례의식들은

신에게 귀속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거나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남성의 의지이다

에덴동산을 벗어난 최초의 인류가 말해주듯

통제구역 내에서의 성장은

하느님도 성공하지 못한 전략이다

끝없이 시달리고 있는 가학적 욕망과 피학적 욕망은

신이 추스르지 못한 분노의 잔해

 

옷은 인간 스스로 입은 통제구역

성장통을 앓는 유기체다

섹슈얼리티 한 육체미로 재단된 55 사이즈

66을 지나 통제 개념을 초탈한 77 사이즈로 변태 하는

몸은 통제구역을 벗으면서 자란다

 

불가사리가 이르지 못한 수평선

중심을 상실한 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통제구역, 여기저기에서

노크를 하면서 지나간다

 

 


 

 

정진경 시인 / 알리바이

 

 

한눈을 파는 동안

알리바이가 뒤바뀌어 있었다

 

내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는 건

굴절하는 렌즈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심중에서 커져가는 의혹 덩어리는

반대방향으로 엇갈리는 사슬을 채우고

나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같은 길도 오가는 방향에 따라서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는 걸

기억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르시시즘의 함량이 과도한 거울을

네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굴절되는 렌즈가 알리바이에 개입되는 순간

오른쪽이 진실이고

왼쪽이 거짓이라는

후경이 가진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이든 간에 알리바이를 요구한다는 건

몸 어디선가 철거덕,

덫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취조하려 들면

나는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알리바이는

내게서 증명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서 증명된다

 

 


 

 

정진경 시인 / 네안데르탈인 사진을 보며

 

 

 일요일은 인큐베이터다

 사냥감을 포기한 원시인이 되는 날이다

 빌딩마다 실업주의보가 내려진

 불 꺼진 창은 동굴이다

 

 정오부터 내 몸 안의 생쥐란 놈, 실험용 눈알을 번득인다 에스컬레이터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시달려온 뇌 세포, 책 호르몬 부족 성장 멈춤증, 후생에 구제 금융도 없는 진단서를 끊는다 일주일 내 눈독들인 먹이 사냥을 나선다 장석주의 헐렁한 바지를 먹고 보를레르 악의 꽃을 먹는다 풀어놓은 넥타이는 신발도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헐렁한 옷 속에서 나는 네안데르탈인 사진을 본다 먹을수록 허기에 시달리는 영장류 뇌가 익는 냄새,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는 처절한 휴식을 한다 그래야만 퇴화를 멈출 수 있는

 

 탐욕의 눈빛으로 터질 듯한 세상 사냥을 나선다

 

 


 

정진경 시인

1962년 부산에서 출생. 1987년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 졸업.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타미라 벽화』 『잔혹한 연애사』 『여우비 간다』.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