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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정 시인 / 다이빙하는 남자
중세시대 사제 복장을 한 남자가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이복동생을 사랑한 사제가 몸을 던졌다는 검은 절벽 그녀를 태운 배가 백 년 전 거품으로 사라져버린 곳
그러나 비극은 되감기 버튼처럼 가짜 사제가 능숙하게 절벽을 기어오르고 각설탕 같은 이빨을 반짝이며 시작된다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든 비운의 사내는 잘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흠뻑 젖은 사제복을 입은 그는 이 도시의 명물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을 물방울무늬로 포장해주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근처 절벽에 있는 '다이빙하는 사제’ 레스토랑에선 핏물 번지는 스테이크를 썰며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렴한 비극을 감상할 수 있다
감청색 잉크에 펜촉을 꽂듯 비극은 선명하고 희미한 습관이 된다
임현정 시인 / 벚
목이 잘린 후에도 아주 잠깐 볼 수 있다고 해
광어는 봤을까 동강 난 몸이 명랑하게 팔딱이는 걸
네가 떠난 후에도 내 사랑은 아주 잠깐 팔딱이는 걸
벚 아래 서면 가장 환한 가지를 잘라 목에 꽂고 싶다 말 대신 꽃잎이 날아갔음 해
잘린 너도 아주 잠깐 꽃을 피우겠지
임현정 시인 /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상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임현정 시인 / 사과궤짝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어
우리는 밀밭 빛깔 트럭을 타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지
아직 앳된 운전병이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어 뜨거운 액체가 바지를 적시고 발밑에 작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그는 사과궤짝에 남은 썩은 사과처럼 검붉은 과즙을 흘리고 있었지
고요한 저녁이 오고 있어
작은 고랑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무른 사과는 입을 조금 벌린 채로 편안해 보였지
한밤, 더러운 야전침대에 누워 불러야하는 이름들이 있어
영문도 모르고 죽은 어린 영혼들 머리맡에 앉아서 정답게 속삭이는 것들
죽은 이름들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을 잊는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불러줄 거지?
임현정 시인 / 나무 위에 고양이
오렌지주스 병을 핥던 때처럼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지.
이 도시의 가로등 불빛은 녹슨 피조차 오렌지 주스야.
언젠가 꽃모가지를 리본으로 묶은 걸 보았어. 그녀도 그렇게 툭툭 팔을 분지르며 곤두박질 쳤지. 네가 모가지에 칭칭 감아준 질긴 전화선 난 이 도시의 색소가 좋아.
이 흥건한 오렌지 빛 핥을 수도 없어 먹통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 무서운 길을 네가 지나갔지.
그녀를 탬버린처럼 흔들던 가쁜 숨소리가 사라진 은행나무 아래는 둥근 마침표처럼 부드러운 흙이야.
뾰족한 화살은 노란 중심으로 날아가 박혀. 그러니까 그 눈빛은 네 거야.
잃어버린 물건, 네 가슴팍에 놓고 갈게. 하얀 장갑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수소풍선처럼 날아가버린 털을 곤두서게 하는 오렌지빛 비명도.
축하해. 야옹
임현정 시인 / 한뼘사과마차
달리는 마차에서 뭘 할 수 있어
눈물글썽별무리를 겨냥하거나 까무룩 잠결에도 자꾸만 닳아 없어지는 발굽 소리를 듣거나 늑대인지 개인지 베어 먹기 좋은 달을 쫓아 우린 언제쯤 전복될까
심장의 열기로 익히는 요리가 있대 막 식기 전의 심장으로 끓인 수프 늑대인지 개인지 찹찹 피 웅덩일 핥는다 땅으로 스며드는 끈적수프
힘껏 던진 도끼처럼 멀어지는 걸 사랑해 멀어지는 편지 멀어지는 레일 멀어지는 탈주
내리막엔 마지막 단추를 오르막엔 방금 빤 입술을 모퉁이엔 까마귀가 숨긴 단추 아주 간지러운 구멍
한쪽 뺨이 상한 사과 속을 전속력으로 달려도 우린 달콤하게 썩을 뿐
아무도 찾지 못한 눈동자였음 해 아득히 밤만 보며 달리는
고삐를 쥔 채 미친 듯이 내달리는 달그닥 해골 네 목숨이었으면 해
임현정 시인 / 꺼질 듯 바람계곡
구멍 난 치즈처럼 보여도 중앙계단을 타고 오르면 꽤나 전망 좋은 절벽이에요 칠백번째 계단참에 제방이 있어요 왼쪽은 아, 마침 루시 아줌마가 나오네요
계곡 아래에서 부는 돌개바람에 휩쓸린 사람들 간혹 빨랫줄에 걸려 있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저 아래서 부는 바람을 꺼질 듯, 한숨이라고 부르죠 난간을 꼭 붙들어요 손수건처럼 휙 날아가기 전에
견학을 온 여자애가 울고 있네요 지갑이 없어졌다는 건데 동무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바람 불 때 보았죠 빙글빙글 날아가는 노란 지갑 둥글게 부푼 공단 치마 아래 푸른 지폐들까지
꼭대기 방은 미완성이에요 손톱이 자랄 때까지만 쉬고 다른 사람이 안내할 거예요
어떤 여행자들은 여길 떠나지 못해요 어깨를 스치는 좁은 계단과 숨소리가 들리는 작은 방 검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이죠 그래서 손톱 밑은 붉고, 부드러운 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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