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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라연 시인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5.
박라연 시인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시인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박라연 시인 / 나의 어머니

 

 

배꽃처럼 고우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무릎을 깎듯 산 하나 깎으시며

홀로 지켜주신

지아비의 풍류에 산도

들도 인정마저 돌아눕던 날

고첩까지 외가로 데려가시던

 

못다한 어미 사랑

초향골 골골이 할미꽃 피더니

어느새 칠순

자식 사랑은 속사랑이

진짜니라 우리는 텃밭에서

무우꽃으로 자라고

 

 


 

 

박라연 시인 / 그래서

 

 

무심도 하셔라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어찌 이리도 태연하시나

 

하늘이 나의 애인인 적 없다 그래서

 

불타는 귀와 눈과 입을 꺼내어 호미든

칼이든

낫이든 만들어야 한다

 

 


 

 

박라연 시인 /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죄 없는 세계의 절반을 점거했을 때에도

누군가의

따뜻함은 흘러가 사과를 붉어지게 하고

상처는 흘러가 바다를 더 깊고 푸르게 하는 걸까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어디까지

나아갈까

아픔에게 포위되지 않으려고 나무를 뚫고

물을 뚫고 언제까지 다이빙할까

 

그런데 이 마음은 또 뭐지

성난 불우에게 아군이고 싶은 이 마음 말이야

마음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금빛 물결은 누가 보낸 설렘이지

위로의 빛은 어디서 오나

 

헤어진 이름을 수없이 부를 때 딱

한번은

나타나주는 순간 바다였을까

내 떨림의

물결 한가운데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박라연 시인 / 모현동 중앙하이츠 5동 202호

 

 

땅거미가 질 무렵엔

낮은 풍경들이 식구처럼 들어와 앉는다

맨발의 공터는 몇몇의 밭이 되어 푸르고

논들은 겹겹이 조금씩만 살을 대고 출렁인다

그 끄터머리쯤엔 잔잔한 물결이 있다

누구는 방죽이라 부르고

누구는 수렁이라 부르지만

세평 거실에 마주 앉아

名詩를 읊듯이

名畵를 보듯이 세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맘에 맞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면

저 잔잔한 물결이 숨쉬는 그릇은

언제나 호수가 될 터인데

명시와 명화의 소재들이 햇살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잠수해 들어가

헤맬 만큼 헤매이다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오면

또다른 명시와 명화가 될 것 같았는데

호수 너머엔 새길이 있고

논이 있고 그 너머엔 마을이 있기에

외로움 따위는 문제없다 싶었는데

 

 


 

 

박라연 시인 / 시의 씨앗

 

 

시 밭에 씨앗을 뿌리고

꽃대를 올린다

봉오리가 맺고

꽃이 필 때까지

모질게 몰려온

비 바람 눈을견딘 세월이

활짝 피어올라

함박웃음이다

 

삶에는

지혜와 감사가 기쁨이라고

용의 해에 비상하는

시인의 순수한 시심이

풍성하게 솟아오르길

기도한다

 

 


 

 

박라연 시인 / 꽃 향도 전파를 타고

 

 

온 천하 시인님들!

포이트리 BS 채널을 고정해봐요

 

뉴스특보

아 글쎄

비오시인이 비호같이

詩, 정상에 오른 다네요

 

살풋한 미소로

우리 곁에 다가와

삶의 기쁨을 담을 수 있는

이곳에서

둥지를 튼 날

 

언어의 씨앗들이 풀꽃이 되고

숲이 되고

이파리마다 상큼한 녹음 향기를 퍼뜨렸나니

 

오늘, 이 환희의 순간

윤슬처럼 반짝이는 詩心으로

행복의 나래가 펼쳐지길

축복합니다

 

포이트리 BS 빅뉴스에 라연입니다

 

 


 

 

박라연 시인 / 해녀의 세계

 

 

 몸으로 어둠의 혓바닥을 확 그을 때 환해진 어둠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생포한 어둠만 생생한 물속 어둠만 들이켜는 해녀 물질할 때만 그 순간만 겨우 환해도 족하다

 

 가마우지 날고 몸 하나 띄울 저 맑은 물살이면 족하다 수십 해의 숨비소리와 맞바꾼 쭈글쭈글한 심장을 팔아 몸에 밴 짠맛 팔아 잠재울 풍랑이면 족하다 환함을 물에 풀어 끼니의 등대 먹여 살릴 수 있다면

 

* 해녀들의 속담.

 

 


 

 

박라연 시인 /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그릇에 넣어줘야 먹을 수 있잖아? 몸이 없으면

금방 떨어져 죽고 말던데 말만도

마음만도 고맙다고? 어휴

 

말이든 마음이든 걷고 뛰고 버스에 기차에 오르려면

몸이 필요해

 

계산된 마음이 얼비치자마자 죽사발 될까 봐

가난하면 가난한 채로

못 배우면 못 배운 채로 쑥쑥 자라던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화기애애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 네 네 그저 유리창이나 닦는 일 누구에게라도

만만하게 뵈는 일이 최고죠 네 네

 

훤히 비치는 물결 위 연두나 꽃잎을 쓰다듬던 고객들

팔만 쭉 뻗으면 붉은

열매쯤은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다는 듯

 

굳은살 박인 네 고독은 얼마든지 뜯어내 휘저으며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듯

 

​그럼 그럼! 무료함을 흔들어대면서— 좀더 오래

놀다 가실 거라서

 

 


 

박라연 시인

1951년, 전남 보성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학 석사, 원광대 국문학 박사 학위.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