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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인 /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박라연 시인 / 나의 어머니
배꽃처럼 고우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무릎을 깎듯 산 하나 깎으시며 홀로 지켜주신 지아비의 풍류에 산도 들도 인정마저 돌아눕던 날 고첩까지 외가로 데려가시던
못다한 어미 사랑 초향골 골골이 할미꽃 피더니 어느새 칠순 자식 사랑은 속사랑이 진짜니라 우리는 텃밭에서 무우꽃으로 자라고
박라연 시인 / 그래서
무심도 하셔라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어찌 이리도 태연하시나
하늘이 나의 애인인 적 없다 그래서
불타는 귀와 눈과 입을 꺼내어 호미든 칼이든 낫이든 만들어야 한다
박라연 시인 /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죄 없는 세계의 절반을 점거했을 때에도 누군가의 따뜻함은 흘러가 사과를 붉어지게 하고 상처는 흘러가 바다를 더 깊고 푸르게 하는 걸까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어디까지 나아갈까 아픔에게 포위되지 않으려고 나무를 뚫고 물을 뚫고 언제까지 다이빙할까
그런데 이 마음은 또 뭐지 성난 불우에게 아군이고 싶은 이 마음 말이야 마음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금빛 물결은 누가 보낸 설렘이지 위로의 빛은 어디서 오나
헤어진 이름을 수없이 부를 때 딱 한번은 나타나주는 순간 바다였을까 내 떨림의 물결 한가운데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박라연 시인 / 모현동 중앙하이츠 5동 202호
땅거미가 질 무렵엔 낮은 풍경들이 식구처럼 들어와 앉는다 맨발의 공터는 몇몇의 밭이 되어 푸르고 논들은 겹겹이 조금씩만 살을 대고 출렁인다 그 끄터머리쯤엔 잔잔한 물결이 있다 누구는 방죽이라 부르고 누구는 수렁이라 부르지만 세평 거실에 마주 앉아 名詩를 읊듯이 名畵를 보듯이 세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맘에 맞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면 저 잔잔한 물결이 숨쉬는 그릇은 언제나 호수가 될 터인데 명시와 명화의 소재들이 햇살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잠수해 들어가 헤맬 만큼 헤매이다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오면 또다른 명시와 명화가 될 것 같았는데 호수 너머엔 새길이 있고 논이 있고 그 너머엔 마을이 있기에 외로움 따위는 문제없다 싶었는데
박라연 시인 / 시의 씨앗
시 밭에 씨앗을 뿌리고 꽃대를 올린다 봉오리가 맺고 꽃이 필 때까지 모질게 몰려온 비 바람 눈을견딘 세월이 활짝 피어올라 함박웃음이다
삶에는 지혜와 감사가 기쁨이라고 용의 해에 비상하는 시인의 순수한 시심이 풍성하게 솟아오르길 기도한다
박라연 시인 / 꽃 향도 전파를 타고
온 천하 시인님들! 포이트리 BS 채널을 고정해봐요
뉴스특보 아 글쎄 비오시인이 비호같이 詩, 정상에 오른 다네요
살풋한 미소로 우리 곁에 다가와 삶의 기쁨을 담을 수 있는 이곳에서 둥지를 튼 날
언어의 씨앗들이 풀꽃이 되고 숲이 되고 이파리마다 상큼한 녹음 향기를 퍼뜨렸나니
오늘, 이 환희의 순간 윤슬처럼 반짝이는 詩心으로 행복의 나래가 펼쳐지길 축복합니다
포이트리 BS 빅뉴스에 라연입니다
박라연 시인 / 해녀의 세계
몸으로 어둠의 혓바닥을 확 그을 때 환해진 어둠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생포한 어둠만 생생한 물속 어둠만 들이켜는 해녀 물질할 때만 그 순간만 겨우 환해도 족하다
가마우지 날고 몸 하나 띄울 저 맑은 물살이면 족하다 수십 해의 숨비소리와 맞바꾼 쭈글쭈글한 심장을 팔아 몸에 밴 짠맛 팔아 잠재울 풍랑이면 족하다 환함을 물에 풀어 끼니의 등대 먹여 살릴 수 있다면
* 해녀들의 속담.
박라연 시인 /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그릇에 넣어줘야 먹을 수 있잖아? 몸이 없으면 금방 떨어져 죽고 말던데 말만도 마음만도 고맙다고? 어휴
말이든 마음이든 걷고 뛰고 버스에 기차에 오르려면 몸이 필요해
계산된 마음이 얼비치자마자 죽사발 될까 봐 가난하면 가난한 채로 못 배우면 못 배운 채로 쑥쑥 자라던 소녀는 환하고 나는 유리창을 닦는다
화기애애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 네 네 그저 유리창이나 닦는 일 누구에게라도 만만하게 뵈는 일이 최고죠 네 네
훤히 비치는 물결 위 연두나 꽃잎을 쓰다듬던 고객들 팔만 쭉 뻗으면 붉은 열매쯤은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다는 듯
굳은살 박인 네 고독은 얼마든지 뜯어내 휘저으며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듯
그럼 그럼! 무료함을 흔들어대면서— 좀더 오래 놀다 가실 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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