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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성 시인 / 더 할 수도 있지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5.
김연성 시인 / 더 할 수도 있지만

김연성 시인 / 더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지고 나서

한 게임 더 하자고 우길 수도 있지만

승리를 장담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오랜만에 고교동창을 만나 당구를 치는 날

서로의 안부는 건성으로 챙기고

지난번 패배의 설욕을 다짐하면서

수구와 적구 사이에는 적당한 힘의 안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각의 당구대 안에서 자꾸 어긋나는 공을 보면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욕심이 문제인 것이다

스물여섯에 교통사고로 다친 어깨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만

지나친 승부욕이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이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어떤 수구와 적구가 구르고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삶이란 무조건 앞으로 돌진한다고 성공하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둥근 공은 여전히 제멋대로 구르고

오늘도 붉고 흰 패배를 예감하지만

차라리 깨끗이 승복하고 술이나 한잔 하러가자고 제안할까 망설인다

쓰디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산다는 게 여전히 어려운 노릇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게임 더 할 수도 있지만

 

- 2014년 <시와 사람> 여름호

.

 


 

 

김연성 시인 / 독한 것들

 

 

 세상엔 독한 것들 참 많다

 

 저 검푸른 심연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태풍을 독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태풍이 지나간 자리,

 일제히 북쪽으로 쓰러져 있는 풀들을 보고 독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살아보겠노라

 서울 한복판, 뙤약볕에 쭈그리고 앉아 노점을 하는 늙은 할머니를 누가 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유로)

 

 살다 보면 독한 것들 너무 많아

 아무 죄 없이 그것들만 보면 차라리 눈 돌리고만 싶었는데

 힘이 없기도 하거니와 모질지 못해 눈 감고 싶었는데

 그 누가 독한 것들을 탓할 수 있을까

 

 세상의 독한 것들은 모두 보호해야 한다

 천막을 치고 촛불을 켜고 확성기를 틀고

 모두 광장으로

 광장으로

 

 이 세상엔 독한 것들 너무 많다

 

-시집 <발령났다> (2011년)

 

 


 

 

김연성 시인 / 부치지 않은 葉書

-嘔吐

 

 

아무것도 안 변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가 먼 현재에 있는지

가까운 미래에 있는지 그걸 모른다

눈 떠 있다는 것, 감히

그리고 끝없이 껴안고 싶었던 인식이라는 고통의 사슬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잉여물이지

요즈음 나는 자꾸

금새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위험스런 폭발음이다

아 봄이다

낡은 몸은 다시 기쁜 꿈을 꾸리라

창밖, 허공에 매달린 목련꽃송이가

하얀 죽음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릿조실 내딛을 때

 

 


 

 

김연성 시인 / 모범이발관으로 간다

 

 

설이 내일모레라

서둘러 동네 이발관으로 간다

일곱 살 아들과 간다 그 곳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쑥덕공론하는 곳

그날, 어떤 이는 죽고 또 어떤 이는

시대의 영웅이 되기도 하는데

설혹 머리 감지 않고 가도 되는 곳

그 곳에 가면 나는 왕이다

두 다리 쭉 뻗고 고개 뒤로 젖히고

두 눈도 감고 있으면

세상이 다 내 영토가 되는 곳이다

액자 속 포효하는 호랑이 울음 뒤로

영웅호걸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잡담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싹둑 잘리는 동안

이 세상 온갖 소문 접할 수 있는 곳

그 곳에서 초라한 왕은

음모 같은 수염을 밀고 웃자란 일상을 자른다

귀지까지 파내면 명절이 바로 내일모레다

 

보아라, 눈 뜨면

꾀죄죄했던 아이의 눈도 빛나네

단돈 팔천 원에

오천 원만 더 지불하면 문을 나오네

이 풍진 세상으로 다시 돌진하네

휘적휘적 奉天가네

벽산블루밍궁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어린 왕자의 손을 꼭 잡고,

 

 


 

 

김연성 시인 / 아직도 간절한 것이

 

 

아직도 간절한 것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물컹거리는 비린내가 남아 있다면

저 아파트 앞, 가파른 오르막 같은

숨차오르는 언덕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누군가 어둑어둑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면 아직도

끈적끈적 그 발자국 남아 있다면

지나간 하루와 남아 있는

하루는 얼마나 뒤척여야 푸른 밤이 되는가

내일이 오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나를 퍼내야 하나

 

어쩌다 흘린 검은 비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것이

내 안에 고스란히 고여 있다면

흘러가지 않고 덕지덕지 붙어 있다면

한 순간 눈물처럼 왈칵 쏟아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간절해야

깊은 웅덩이가 되는가 아직도

간절한 바람이 잎잎이 흐느낀다면,

 

 


 

 

김연성 시인 / 詩

 

 

사랑할 것도

더 이상

그리워할 것도

없는

이 몹씁 世上에서

당신을 찾아 이미 헤맨다

 

아주 낯선 얼굴로

어딘가 꼭 숨어 있을,

 

-2009 가을호 『시와 경계 』,《시와경계사 》에서

 

 


 

 

김연성 시인 / 꽃의 불륜에 관한 문답

 

 

 간밤, 바람난 꽃의 불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유로이 문답한다

    (문답에 앞서, 당신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어떤 질문이든 꼴리는 대로 진술할 것을 요구하다)

 

-꽃은 언제 피었나

-피고 지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날마다 꽃 핀다 그리고 진다

 

-꽃잎은 몇 개인가

-어젯밤 폭우에 목 잘린 꽃들의 비명을 듣지 못했나

 가슴을 쥐어뜯는 적요이거나

 흉곽까지 어둑어둑해지는 어떤 슬픔까지도

 내겐 다 깊은 잎이다

 

-꽃 같은 날들은 언제 저무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슬픔의 줄기를 만져본 적이 있다

 그 줄기 끝에서 날마다 돋는 새순을 부정하지 않겠다

 

-지독한 외로움을 오래 따라가면 어디에 당도하나

- 외로움이란 습관적인 것도 있고 선천적인 것도 있다

 그리움이라는 긴 기차는 매일 반복문행 하지만

 어떤 사람역에도 천국으로 통하는 동아줄이나 사다리는 없었다

 

-붉은 꽃은 불륜인가? 사람인가? 고독인가

-천만에! 바람은 어디서든 불어오고 또 어디로든 흘러갈 뿐이다

 만약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다면

 당신은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 보고 싶지 않은가

 

- 검은 꽃의 정체는 무언가

-내장까지 썩은 그 고약한 냄새를 다시는 맡고 싶지 않다

 고독은 고독만이 달랠 수 있다

 

-아직도 마른 꽃대궁 속에 남아있는 뜨거움은 무언가

-꽃이 꽃일 수만 있다면

 언제든 소나기처럼 쏟아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원한다면 너덜너덜해지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면

-어떤 사람도 함부로 불륜으로 번역되는 걸 원치 않으며

 어떤 불륜도 사랑 아닌 사랑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모든 진술을 거부한다

 나 는 여 기 까 지 다

 

 


 

김연성 시인

1961년 강원도 양양 출생. 2005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 『발령 났다』. 웹월간詩 <젊은 시인들> 동인. 2005년 계간 <시작> 신인상 당선. 현재 서울시청 재무과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