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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시인 / 가까운 내면
강은 꽁꽁 얼어 있다 빙판 아래 돈이 얻어 있다 화폐가 얼어 있다 나는 오늘 슬픈 일이 있었는데 말하지 못했어 우울증도 마술이면 좋겠다 신경안정제가 화분에서 싹을 틔우고 흩어지는 깃털 얼어붙은 눈동자 라티시먼스 돌시 latissimus dorsi 동면 암막 커튼 굴러다니는 알약통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빛 갈비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통증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들어오는 나가는 잘려나간 머리 잘리지 않는 칼날 연꽃 구멍 환 공포 구멍 뚫는 기계 건축이 빠진 건축가 예술이 빠진 예술가 젖가슴이 닿지 않는 포옹 미러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에 가려진 그림자
주하림 시인 / 수분
개는 이제 없는데 개가 물 먹는 소리가 난다 이십대가 기억나지 않는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분수가 있는 광장, 달려가면 얼굴로 빛이 쏟아진다 몸으로 들어온 빛이 휜 나무로 뻗어나가는 동안 몸이 수천 개로 갈라지는 상상을 한다 멀고 긴 여행, 줄지 않는 바트 얼음을 띄운 욕조 검게 탄 팔다리가 욕조 밖으로 늘어진다 부서진 벽, 벽 틈에서 들려오는 시곗바늘 소리 부서진 어금니 조각이 떨어져 있고 침대에 묻은 핏자국 상처가 날 빨아들인다 사춘기 시절 꿈, 그 꿈을 다시 꾼 뒤 환풍기가 돌아가고 머릿속 흰 박쥐떼가 빨려들어간다 어둠 속 분쇄, 날개가 머리가 흩어진다 손가락을 넣고 싶다 젖은 핏자국이 그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부두를 지나 보석 상점을 지나 주위는 어둡고 젖어 있다 주머니 속 바트를 꺼내 냄새를 맡는다 호스텔 1층 빈티지숍 대서양에서 배와 트럭에 실려온 백팩으로 로비가 가득찬다 로비 2층 창으로 바람이 분다 혼숙을 하며 건기를 기다린다 열린 창으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티셔츠를 벗는데 브래지어가 벗겨진다 오스트리아인 남자가 그것을 지켜본다
주하림 시인 /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잠들기 전까지 괴기한 생각 이제는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 사촌들 그중 하나가 길바닥에서 발작하며 피거품을 뿜는다 간질이래 얘기 들었어? 블러드 문 blood moon에 고백을 받았대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블러드 문이 뜬 바닷가 바닷가 천국이 지나간 자리 언니의 남자들은 언니 마음이 투사된 그림이야 키코, 그를 잠깐 사람으로 왔던 신이 쓴 글이라고 생각해 종아리 화상 때문에 졸업식 사진은 상반신뿐 잘려 나간 하반신들이 걷고 있을 바닷가 끈적거리는 피의 해변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다 졸업식에 올 수 없는 부모와 누군가에게 일일이 실망할 기운도 없다 120페이지 종아리 화상이 벚꽃잎처럼 보인다 비가 오기 시작
주하림 시인 / 여름 키코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 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그녀 표정은 빈방을 고통으로 채색하려는 듯 더운 곳에 가고 싶다 그리스, 덥고 인간의 환대로 가득한
언니의 의자 모으는 취미는 여름에도 가을에도 끝나질 않는다 남자가 또 도망간 뒤 이제는 취미 대신 아나키스트 땅 거래 집문서 공부를 시작했지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잠들기 전까지 괴기한 생각 이제는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 사촌들 그중 하나가 길바닥에서 발작하며 피거품을 뿜는다 간질이래 얘기 들었어? 블러드 문 blood moon에 고백을 받았대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블러드 문이 뜬 바닷가 바닷가 천국이 지나간 자리 언니의 남자들은 언니 마음이 투사된 그림이야 키코, 그를 잠깐 사람으로 왔던 신이 쓴 글이라고 생각해 종아리 화상 때문에 졸업식 사진은 상반신뿐 잘려 나간 하반신들이 걷고 있을 바닷가 끈적거리는 피의 해변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다 졸업식에 올 수 없는 부모와 누군가에게 일일이 실망할 기운도 없다 120페이지 종아리 화상이 벚꽃잎처럼 보인다 비가 오기 시작
주하림 시인 / 옆자리 약혼자 키나
베드로 성당 기둥에 발을 딛고 있는 천사들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선입장료를 내고 입국심사대를 거쳐야 하는데인파 속 키나의 약혼자는 사라지고키나는 하늘을 날기엔 너무 작은 날개들을 바라보고 있다교황 방 치장을 위해 젊은 날을 석회벽에 그려 넣은 궁중화가그가 매일 붓을 쥐고 올려봤을 천장의 암흑
그가 그렸던 마리아상은 전부 사랑하던 여자의 얼굴이었대그녀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나폴리 항구 레스토랑 키나는 웃음을 터뜨리며마리게리타 조각을 집는다 버팔로 치즈 우유 비린내키나의 약혼자는 약간 굳은 얼굴로 에스프레소잔 가라앉은 크레마를 젓는다이탈리아 남자들은 나를 보며 윙크하는데 손등에 입맞춰 주는데
여름에도 가을에도나폴리에선 아직 마피아들이 밥을 먹고 술을 팔고키나는 그들을 피해 피자집에서 줄을 섰지만호텔방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피자박스처럼 팔려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8월의 차가운 카푸치노, 다른 연인, 망각의 다른 얼굴창문이 열릴 때마다 수음하는 옥상의 로마인 그것을 기다리는 키나
해변과 카페테라스에서 바닷바람에 타들어가는 담배그때마다 키나는 고국의 절망을암흑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생각한다멀리 지중해 절벽에 둘러싸인 해변검은 모래 검은 자갈들바닷물이 밀려올 때마다망각에 필요한 건 연습이 아니라 메이크업을 끝낸 얼굴이나휘파람을 불며 키나를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일지 몰라잊지 못한 것들이 무엇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야키나 너는 내게서 자유로워져 누구와 놀든 누구와 집에 가든로컬버스를 타고 절벽과 언덕을 수없이 왕복하고새벽이면 키나는 홀로 눈이 떠졌다
돈 포토싸이런스우리는 세속에서 죽었다베드로 성당 천장으로 울려 퍼지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만 카라 검은 신부복을 입은 검은 피부의 사제들이천장을 올려다보는 키나 곁으로 다가온다
내일은 북부로 가는 기차를 타 선반 위에 누군가 짐 싣는 걸 도와줄 거야 그에게 기대야지 잠든 그의 낮고 무거운 악몽 속으로 들어가는 내 옆자리 누군가의 약혼녀 키나
주하림 시인 / 젠더사이드 (Gendercide)
검은 비바람 한꺼번에 쓰러지는 빈 포도주병 태어나려한 적도 없는데, 태어나지 마 태어나지 마! 산모가 산더미만큼 부른 배를 주먹으로 치는 방금 딴, 썩은 코르크마개 냄새 풍기는 밤 거꾸로 매달린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빨며 운다
철조망 젊은 남녀가 좁은 구멍에 대고 키스한다 남자 왼쪽 눈가에서 흐르던 피가 여자 콧등에 옮겨 붙고
총살 직전 어머니는 내게 면회를 신청했다 냉담함과 차분함이 피부에 쭈글쭈글 배인 채 어머니 어쩌다 그렇게 쪽팔린 옷을 여러 벌 가져오셨어요 입 다물어라 네 헤픈 웃음 때문에 똑똑한 남자도 바보가 되어버리잖니 저 년도 죽여 버리겠어, 움켜쥐려다 놓친 것들 그녀가 나를 반대하기 위해 들었던 피켓 가져와, 포도 창고에 쌓였지 담요 삽 모든 것에서 매일 장미 썩는 냄새가 나! 이봐 방금 뭐라고 했어 간수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금지 된 곡을 부르자, 재빨리 해프닝으로 끝났다
환한 등대 그가 비춰준 방향, 계획, 설계 둘둘 말린 지도를 던지고 먼저 지상으로 나갔지 그가 보여준 사랑, 알몸, 증오 낡은 지도에 어떤 지명도 적혀있지 않고
탈출을 결심한 꿈들이 하나 둘 담장을 넘다 감전되고 나는 오래 전 갈림길에서 결별한 영혼들을 부르고 있었다 짧은 촛대 일렁이는 불빛 아래, 도대체 바다도 산도 아니고 왜 흙으로 메워버린 저수지가 보고 싶다는 거야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찢고 독방에서의 첫날, 윗입술을 핥으면 칠리소스 맛이 났다
숨소리들이 시멘트벽에 뺨을 대고 뒤척이는 복도 나는 빠진 머리카락을 초콜릿 봉투에 넣어 끈으로 꽁꽁 묶는다 창문이 있었다면 내가 땋은 이야기, 당신의 땅에 닿았을 텐데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지만 사람을 삽으로 때린 적은 있지 몰려든 얼굴들에게 침을 뱉고 십 년 동안 거리를 저주한 적 없지만 그곳에서 끌려왔다 죽은 할머니와 저승사자가 스무 고개를 하는 걸 함께 지켜봤지 밀서를 훔친 건 결국 너였는데 인간들 옆구리에는 보이지 않는 복잡한 태엽이 있어 몇 번 감았다 놓으면 내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고 축제를 열어줬다 펑펑 발바닥에 땀이 고일 때까지 우리에겐 캔디 캔디
지금까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파스타 크림 파스타 일인용 테이블에는 떡 한 접시가 놓여있고 나는 사인을 하는 동안 얼굴에 검은 안대를 씌우는 순간까지 떡을 맛있게 씹었다
입을 벌리며 성교하는 남자의 표정 자궁과 고환을 동시에 거머쥔 육상선수 책의 스물네 번째 페이지 코끼리 얼굴을 가진 가네쉬 잠든 엄마의 등 금발머리 소년들의 짧은 손톱
아껴주고 보살펴야 할 목록들이 남았는데 활활 타오르는 쓰레기장 늙은 청소부가 오버 더 레인보우를 흥얼거리며 커다란 구덩이에 쏟아도, 쏟아도 줄지 않는 당신과 나의 유품
주하림 시인 / 지하소녀 미도리* -당신이 내게 영원을 약속할 때 나는 내가 처음으로 낯설어지지
인사해 우리 미도리한테 인사해 헬로우 미도리 와타시와 슈미와 수박데스 미도리 장난치지 말고 인사해 헬로우 미도리 와타시와 슈미와 펑키데스 미도리 너의 옷감에 벚꽃이 그려져 있구나 나의 속살에도 탐스럽게 수놓아졌던 것 머리채를 잡힌 채 네 발로 끌려온 봄; 서커스의 막사 젖은 빨래를 털면 만개한 벚꽃들이 휘날리는 풍경
나는 아름다움 끝에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가끔 쇼를 끝마치기도 전에 너에게 달려들지 너에게 처음 가르친 말은 당신을 원해요 여기, 여기
불구들을 보는 순간 미도리 얼굴은 굳었다 그러나 병속에 들어가는 난쟁이 사나이는 그것까지도 여정의 한부분이라며 타이른다 미도리의 펄럭이는 춘화;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불태워도 좋을 쯤
저 징그러운 새끼들을 마을에서 쫓아내 빵과 옥수수를 던지던 관객들이 성난 동물들로 변하기 시작한다 불속을 뛰어드는 개와 몸통이 잘린 코끼리 무너지는 막사 지휘봉을 가진 사회자는 더 무서운 마술도 부릴 줄 아는데……
미도리의 신입인사는 세 명의 불구에게 뱀처럼 얽힌 채 끝났다 야 미도리에게도 허리 돌리는 법을 알려줘 당신을 원해요 여기, 여기
미도리는 입을 꾹 다물고 벙어리인 척 연기했다
그렇게 삼 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사회자겸 조그마한 유리병에 들어가는 사나이에게 먹힌다는 소문과 날마다 늘어가는 귀머거리 연기에 흡족해 하던 미도리; 펄럭이는 춘화
미도리는 처음 흥분했고 사나이는 웃으면서 그것을 덮어주었고 원한다는 말의 속뜻을 고쳐주려 했을 땐 계절이 훌쩍 지나버렸다
미도리는 늙지 않고 갈색 눈자위는 더 선명해졌다
가끔 사나이가 다리를 전다 월급을 받지 못한 불구들이 싸움을 일으키고 미도리는 예전보다 조금 밝아졌다
안녕 미도리 나는 너의 첫 번째 남자, 꼬인 팔다리로 치마를 찢고 네 안을 꽉 채운 아니라니? 오 미도리 네가 걸을 때마다 뚝뚝 흘리는 걸 치우느라 멀쩡한 것들까지 엉망으로 꼬였는데! 미도리가 씽긋, 웃었다
관객들 비명소리 식상해 미도리 나는 늙었구나 너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그러나 누군가 너를 가지겠다고 하면 더 늙어빠진 당나귀로 만들어버릴 테야 이제 쇼다운 쇼를 할 거야 수고 많았어 돈을 줄게 강을 건너면 네가 태어난 마을이 나와 약속을 정하자 어차피 넌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까 우리 헤어질 장소는 내가 정할게 내가 너의 어디로 가면 될까
미도리가 무대 위 만져지지 않는 벚꽃나무를 바라본다 더 끔찍한 마술을 보여 줄래요? 당신을 떠나야만 한다면 병속에 들어간 남자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흐느낀다
나는 아름다움 끝에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가끔 쇼를 마치기도 전에 너에게 달려들지 네가 끝내 가로채간 말은 당신을 원해요 여기, 여기
* 영화 「Mr. Arashi's Amazing Freak Show」의 등장인물들을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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