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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경 시인 / 화엄전 가는 길
달빛을 사뿐히 밟고 지나가는 푸른 물소리를 들었는가 징금다리 건너면 화엄의 계단
바람도 달빛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나
달빛 따라 돌계단 오르면 태극의 붉은 대문 있으리
석연경 시인 / 손
풍경마다 뭉툭한 손이 있다 싹이 겨우 올라와 꿈틀거리는 언덕배기 보리밭에도 있고 퍼런 힘줄이 산맥 같은 유적지의 손등 어둑함과 캄캄함 빛과 그림자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도 손바닥 여러 개가 있다
손이 움직이는 오후 2시 여기는 고비사막 선인장의 심장에서 쿵쿵 천둥소리가 난다 휩쓸려 다니던 모래가 가시를 스친다 손이 태양의 손목을 잡자 번개가 친다 커다란 손바닥이 들어 있는 물방울이 후두둑 내린다
밤새 물길이 생긴 대지모 손바닥에 물고기가 튄다 바다에 가닿은 강물의 윤슬이 손을 흔든다
적막이라는 이름으로 까마귀떼가 난다 앙상한 손에서 죽은 살이 일어난다 들판에 마른 풀이 날린다 댕강 떨어진 꽃이 있다 딱 부러진 마른 가지가 있다 당신이 삼키는 것은 묵도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
각진 얼굴이 떠다닌다 사각형이 사각형을 삼키고 마름모를 낳는다 오각형이 정육면체를 낳고 각진 거울이 각진 거울을 낳아 무한 증식되는 각각의 각 굉음과 폭음 쏟아져나온 미아의 행진
가면을 쓴 얼굴을 두드린다 손이 각을 쓰다듬으며 둥글린다 무지개 한 움큼 쥔 얼굴이 걷는다 베어진 나무와 겨울나무에 움이 튼다
눈보라 속에서 갈퀴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커다란 은빛 손 히말라야 설산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지팡이가 손을 흔든다
둥근 손톱에 연분홍 장미가 핀다 물길의 방향이 둥글게 대지를 감싸고 돌 때 손가락이 길다 여윈 네 얼굴을 쓰다듬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석연경 시인 / 영산회상도
독수리가 정상에 앉아서 오묘한 말을 듣고 있다
달빛 삼매 속에 연꽃수만송이 피어있다
한송이 연꽃에는 수만가지 향기
꿈속의 꿈을 꾸어도 나는 수미단에 앉아 있다
오색의 안개가 피어오른다 눈으로 보는가 귀로 듣는가 물속씨앗과 뿌리가 향기로운 꽃이 된다 번뇌가 보리고 보리가 번뇌려니 연꽃 위를 걷는 사람은 향기로운 발자국을 남기리
석연경 시인 / 심목心木 고향수
폭설이여
먼 옛날 보조국사 마른 향나무에 난난분분 내리느냐
활활 타는 화두에 한점 먼지라
눈 코 귀 입 자취가 없네
누군가 정혜쌍수를 물으면 죽어서도 죽지 않는 고향수를 보여주리
조계문 앞 무성한 심목心木을
석연경 시인 / 인월암 석화石花
예전 삼밭등이골에 와공이 송광사 기와를 굽는 동안 판와암 경판에는 불법의 구름이 피어올랐지
구산스님 인월정사에서 가져온 눈 푸른글씨가 인월암 이마에 걸려 달빛을 새기네 편백나무와 대숲 사이 돌길을 바라보며
가파른 축대 위에서 좌선하는 암자 짙은 그림자에 먼지가 쌓이면 누가 닦을 것인가
달빛 환한 날 암자 기와에 석화 한 송이 피어나니
석연경 시인 / 이렇게 해서 꿈에서 꿈으로 닿았다
원이 슬픔의 호수에 잠겨 있다 폭설이 고독 위에 쌓인다 건조한 바다가 출렁인다 궁전은 미아의 늙은 꿈 벌거벗은 구름이 시공을 가로질러 대륙에서 대륙으로 바다에서 바다로 아무렇게나 날린다 상상의 깨진 거울이 사막까지 흐르고 적시는 눈물의 이력 깊은 음성으로 눈발 날리는 허공에 노래의 날개를 펼친다면 침묵하는 저녁이 토해낸 저녁의 혈흔 가을이 어떻게 왔다가 겨울이 어떻게 오느냐
운명을 조롱하는 바람은 은빛 눈사람을 데려간다 광대가 줄이 없는 공중에서 눈발을 타고 죽음의 곡예를 한다. 그로테스크한 검은 눈송이가 비극적 폭설에 휩싸여 얼어서 흐르지 않은 협곡 사이로 진눈깨비 고독을 흩뿌린다
의심스러운 말이 골짜기마다 성을 쌓아가는 동안 호수의 표면에는 미세한 판화들 지성과 감성의 눈밭에서 춤추는 하얀 고양이 무리 머나먼 행성에서 떨어진 편린과 무거운 금빛 열매를 감싸고 있던 단풍잎을 눈발은 어디로 지우나
꿈의 신전 눈발들아, 위로 치솟아서 하늘 문을 열어라 침묵의 은빛 언어는 9억 마일 이상 내달린다 쨍 구름이 걷히는 것은 한순간
원은 아직 죽지 않았다 협곡에서 들려오는 미풍의 멜로디 이렇게 해서 원은 봄에게로 여름의 비상을 한다 후끈한 바람이 숲을 건너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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