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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인희 시인 / 관계의 고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4.
김인희 시인 / 관계의 고요

김인희 시인 / 관계의 고요

 

 

그 고요에 채색한다

변함없이 오늘도 강물이 흐르고

태고적부터 흘러

너와 나의 손을 잡고 있는 강물

속 깊이 숨겨진 고요

그 고요속에 면면이 채색된 무늬들

관계

 

오늘도 강물은 흐르고

그 강가에

산책나온 사람들이 잉어에게 말없이 먹이를 주고

새끼를 데리고 나온 청둥오리에게도 주고

백로는 멀찌감치 서서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강가의 돌들과 들풀들도 그 고요에 채색한다

 

볌함없이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오기전

우리는 그 강가의 산책을 즐기고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청둥오리에게도 먹이를 주고

강물 속 깊이 숨겨진 관계

그 고요에 채색한다.

 

-월간 『현대시』 2010년3월호

 

 


 

 

김인희 시인 / 성하의 숲 속에

 

 

 산딸나무꽃들이 떨어졌는데

 아무도 그 소리 들은 사람 없는데

 꽃의 발자국인줄 알았는데

 뱀꼬리가 얼핏 보였다

 여름은 그냥 흘러갈 것이다

 

 숲은 어둡고, 어두운 숲에 새들이 모여앉아 하얗고 동그란 찐빵 하나를 쪼아댄다. 자세히 보니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돌이었다. 숲에는 새들의 먹이가 많다는 풍문이 몇 차례 돌았고, 모여 온 새들은 모난 돌들을 쪼다가 부리를 다치고 있었다 아무도 그 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많은 새들이 죽어갔다. 그 길을 갈 수도 안 갈수도 있었는데, 왜 그리로 들었을까,

 안가도 되는 길, 어렵게 보여서 갔다. 앞서간 친구 보이지 않고, 뒤따라오는 친구 없었다. 태풍에 넘어져 영 일어서지 못하는 나무들 밟고 갔다. 밟는 자가 울었다. 새들이 포르릉 날아갔다 죽은 새들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숲은 숲

 길은 길

 어떻게 돌아왔을까, 지난해에 갔던 꽃들

 돌아온 숲에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2018 <시와표현>가을호

 

 


 

 

김인희 시인 / 그 빛 여호와, 몸을 원하네

 

 

고난을 뼈에 새긴

몸을 가진

그 고난, 품격이 된

지상에 서 있는 나무들이 있다

 

그 빛 여호와,

"세상에 임할 때에 제사도 예물도 원치 않고

오직 몸만을 원했느니라.”*

"이긴 자는 땅을 차지하고

진자는 하늘을 차지한다."**

 

몸을 가진 지상의 나무들이 경전이 된 적이 있다

세상의 권세를 한 손에 쥔 여호와조차도

한 그루 나무로 지상에 살고 싶었던 적 있다

 

내 몸에 새겨진 고난과 사랑의 흔적

몸이 없는 그가 가장 부러워한다.

 

* 성서

** 바가바드 기타

 

-월간 <현대시> 2018년 9월호, 신작특집

.

 


 

 

김인희 시인 / 아침

 

 

빨개진 두 발을 오그리고

청둥오리 날아오르는 새벽

도심 외곽의 새벽은

낮게 강 숲을 차고 오르는

발 시린 철새의 울음으로 깨어난다

 

잠들지 않겠다는 청춘의 시간들

맑은 물처럼

푸른 안개 사이로 깨어나는 아침

좌표를 따라

수 천 킬로를 날아와 빈 논에 내려앉을 때

그 자리에 아침이 왔다

 

그때마다 새롭게 태어났다

다시 비상하는 점(點)

비상하는 겨울새 떼의 날갯짓에

아직은 잠이 덜 깬 아침의 시간 사이

남아있던 어슴푸레한 어둠 한 움큼 딛고

청둥오리

푸드득!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시와표현 2019년<1•2월호>

 

 


 

 

김인희 시인 / 겨울밤을 서둘러 떠난 나의 애인들아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자

세상에는 매서운 겨울 추위가 닥쳐왔네

모두가 벗어서 추웠네

부끄러워서 더 추웠네

견디지 못하여 아무도 벌판에 살지 못했네

천상에 남은 자들은

바늘 끝처럼 몸을 웅크려 살았네

뜨거운 지상으로 떠난 자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겨울밤을 서둘러 떠난 나의 애인들아,

차가운 세계로 돌아오라

천상의 차가움만이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니…”

추워서 떠난 그들에게 수없이 편지를 쓰네

남은 자들의 편지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네

 

햇살 맑은 지상의 겨울 아침

가슴 저리게 두고 온 자들이 그리워지는

그저 무심히 아침의 햇살이

정원의 소나무 위에 반짝이며 내려앉는 오전

당분간, 우린 다 함께

천상에서 온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겨울 정원이 열리는 것을 봐야 하네.

 

2022년 예술가 겨울호

 

 


 

 

김인희 시인 / 한강 다리의 변명

 

 

내가 사는 방법은 흔들리지 않고 서 있기

발붙일 곳 없는 허공 속을 돌아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허공에 그려진 둥근 자국 누구도 지울 수 없어

흘러간 사람들이 지나가야 하는 길

 

내가 사는 방법은 너를 움직이는 것

흐르다 굳어버린 너를 풀어

바다로 들판으로 하늘로 보내주던 기억

한강 다리는 늘 거기 있고

돌아와야 할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한

변심한 것들이 모여 흘러가는

한강은 흐르고

한강물은 계속 흐르고

 

폭우는 쏟아지고

황톳물을 바라보는

다리 위의 사람들 거기 서 있네

황톳물은 세상을 덮을 기세로 흘러가는데

한강 다리는 늘 거기 있어

 

 


 

 

김인희 시인 / 전산오류가 일어나기 전

 

 

막다른 골목, 아이들의 웃음소리

시간은 적당히 확장되어 골목이 환하다

빨강 파랑 꽃들이 숫자로 적히는

여기, 전산오류가 일어나기 전

곧 무너질 것들의 기쁨이여

 

꽃들은 계속 순수를 버리며 유쾌한 하루

꽃들이 떨어지고 있다 하드 속으로

유다의 아이들이 하드의 막다른 골목을 지나

뚫린 길을 찾았다

은화를 좋아하는 유다의 아이들

모두 도로로 나와 질주하는 중이다

세계가 둥근 은화의 끈에 묶인다

 

하드 속으로 돌아온, 상한 꽃들을 껴안은 예수

유다에게 자리를 빼앗긴 예수

패배한 예수, 땅을 내주고 하늘로 올라간다

처형된 예수, 둥근 전산기 뒤편에서 진행하는 부활기획―

꽃들 빠르게 지고 우주체적 180 도로 커진다

전산오류의 시간

질주하던 유다의 아이들 , 곧 우주모퉁이 블랙홀에 부딪힐 것이다

 

둥근 전산기의 시간은 영원하다

자판을 두들기던 예수가 천천히 일어나

유다의 자리로 돌아온다

직선의 골목길에 쌓아둔 유다의 은화들

길이 둥글어지자 거꾸로 쏟아진다

 

처음인 듯 아이들의 웃음소리

예수의 아이들이 막다른 골목을 지나

뚫린 길을 찾았다

예전에 살던 그 모니터에 나타난다

 

 


 

김인희 시인

1947년 경북 봉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199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2010년 경희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졸업. 시집 『아담의 상처는 둥글다』 『별들은 여자를 나누어 가진다』 『여황의 슬픔』 『시간은 직유 외엔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석하지 말라하네』 『내 사랑, 흰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