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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백 시인 / 사막의 양귀비
고비 사막 에르 위로 포슬포슬 내리는 비에 아득히 먼 별똥별을 임처럼 기다리다 밤새워 젖은 채 노숙한 한 떨기 양귀비꽃
햇빛의 꼬드김에 세상 밖에 나왔다가 갸우뚱 고개 숙인 게 참 수줍어 보여서 스치고 가는 말굽이 낚아채 갔나보다
저만치 말발굽이 밟고 간 자리에 빠알갛게 어여쁜 양귀비로 피어나서 사막을 문득문득 붉게 물들이고 있느니
-《시조21》 2021. 여름호
이동백 시인 / 마추픽추
손가락 지문으로 더듬더듬 너를 읽는다 돌로 꾹꾹 눌러쓴 연하장 어루만지며 바닥을 뒹굴던 시간은 벌떡 손가락 위에 가부좌튼다
기쁜 첫마디가 뾰족한 돌 끝에 가파르다 칸칸이 먼지 앉은 햇살들 자리 바꾸며 바쁘다 행간은 여전히 의문의 휘파람 콘도르 날개 새겨진 우르밤바 강물의 검은 경련이 아직도 차갑다
손가락 끝에 조금씩 습기가 고인다 가을을 덧씌운 어금니 몇 개 살려놓은 폐허의 규칙 말은 입안에서 혀를 놓치고 의미는 자주 길을 잃는다 점자위 눈을 감은 손가락은 수전증을 앓는다
수없이 돌고 돌아 나오는 나선의 지문 속으로 수없이 헛돌고 헛돌아 나온 나의 맹목이 스며든다 이미 오래전 드러누웠던 이제 막 떠나야 할
-월간 《현대시≫ 2021년 5월호
이동백 시인 / 겨울, 파르티잔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흘러가려는 마음 붙잡고 물처럼 살기싫었다. 톡 톡 돋는 말 마디마디 입 밖에 나오자말자 얼어붙었다. 저해 짐짓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하산길 마지막 햇살 받아 반짝거린다 일으켜 세웠던 한 때의 바람 문득 다시 찾아온 듯 우듬지가 흔들린다 시린 속이 환하게 다 보인다. 온전히 자폐로 견디어 온 마지막 얼음꽃
이동백 시인 / 오래된 미래
4차선 도로를
유유히 횡단하고 있다
손수레 파지 누런 중앙선을 넘는다
몸이 확 접힌 채
수레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노인
애벌레 같다
등과 배를 비틀며
감옥 쇠창살 같은 손잡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주름투성이 저 몸뚱아리
허공으로 들릴 듯
높다랗게 쌓아 올린
우뚝한 파지의 탑
아슬아슬한 저 고치집
이동백 시인 / 보길도에 드러눕다
꽃은 지는 꽃을 보며 지고 동박새 마주 보고 울다가 남쪽으로 귀를 세운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 섬과 섬 이어가다 잃어버린 이름 파도 속에 숨어 들어오는 것을 낯선 집 기웃거리다 몰래 베낀 經 예송리 깻돌밭에 암호 남기며 모락모락 남쪽으로 떠나는 것을 서리 낀 외길 다시 맞닥뜨릴 때 내다본 창이 곧 벽임을 절감할까 질문 또한 대답인 것을 슬며시 수평선 끌어당겨 입맞추면 지는 꽃 피는 꽆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이동백 시인 / 지평선
그 새벽 고비사막이 느닷없이 말 걸어왔다
네게서 목숨처럼 지니는 게 뭐냐란다
답 않고 되받아치니 넌짓 지평선을 부여주었다
-《시조21》2021. 여름호
이동백 시인 / 된내기 골에 핀 10월의 설화
눈부신 아침 햇살에 영롱한 이슬이 반짝이는 드넓은 초원 하얀 팝콘을 뿌려 놓은 듯 환상의 광경이 펼쳐지는 곳
사잇길을 걸으며 들려오는 가을 향기에 취한 꿀벌들의 윙윙거림은 꿈속인가 하는 착각이라도 좋다
산허리가 온통 황홀한 정경 행복에 취한 시선이 모아지는 시간을 저장하는 포토존 흰 물결이 파도치듯 일렁인다
거니는 연인들의 옷자락에서 낭만이 묻어나는 풍경을 훔쳐보는 내 마음을 한쪽의 붉은 메밀꽃이 눈길 빼앗는다
*된내기골: 메밀밭이 펼쳐진 곳의 지명 (청주시 낭성 추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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