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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이지 시인 / 꿈의 범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7.
장이지 시인 / 꿈의 범람

장이지 시인 / 꿈의 범람

 

 

 당신은 밤을 데리고 온다 밤은 오레오 맛, 혹은 담배 냄새가 난다 유리창 너머에서 도시가 비의 부식腐蝕을 견딘 다 유리창을 응시하면 얼굴이 흘러내린다 손바닥으로 거듭 지워도 본능은 거기 있다 나는 외면하면서 나의 이면 과 마주한다 백지와 마주할 때 나는 역광을, 광배光背를 얻는다 어떤 섬광이 흰 벽에 흘러 내리는 새장을 그렸다 가 지운다 지우개가 작업한다 내가 쓴 시의 암호들이 하나씩 지워져간다 나는 지우개로 쓴 편지를 접어 그림자 새 에게 맡긴다 새를 따라 당신에게로 간다 꿈의 비옥한 범람 속으로, 도살장으로, 두께 없는 무간無間으로

 

-계간 <문학과창작> 2023 여름호

 

 


 

 

장이지 시인 / 대니 보이

 

 

말하지 않는 사이에

마음의 틈이 생기고

뱀 같은 것이 그 밑을 기었다

 

여름날이었다

 

넥타이를 맨 친구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고

뒷걸음질로 어둠에 녹아들어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등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목이 늘어난 라운드 티는

부르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뱀 같은 것이 턱관절을 열고

죽어버린 마음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장이지 시인 / 구원(久遠) 12

-세계의 바깥

 

 

지리멸렬의 시간을

지진이 왔다가 멀어지고

해일이 왔다가 또 멀어져 간다.

물 아래 문명의 수면(垂面)이 갈앉아 있고

단정학(丹頂鶴) 몇 마리 그 위를 선회한다.

하늘의 부러진 흰 날개가

바다에 새파랗게 처박힌 오후를

신(神)은 천사들의 도서관에 가서 읽는다

어느 날엔가

중력 잃은 인간들이

대기권 밖으로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뒷모습 적막한 음영시(吟詠詩)의 한 구절이

몬순에 실려 오고,

지구의 마지막 잔존자들은

저물녘 연꽃의 입술 아래에서 가난한 마음을 여민다.

신은 오늘도 목 오신다는 전언과 함께

칠보자개의 저녁 하늘을 보내시고……

아름답고 푸른 카시오페이아 성좌 근처에서는

지구인들의 높고 쓸쓸한 우주선이

시든 꽃잎처럼, 떨어지는 꽃잎처럼

관음보살의 허물어진 눈 속으로 사라져간다.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신의 자장가를

지구인들은 몸 전체가 조리 모양의 귀가 되어 듣는다.

그게 아니라면……

세계의 바깥이 없는 것이라면…

산천이 끊어질 듯 울어도

그 눈물 닦아줄 손 없을까봐

지리멸렬의 시간을

별빛은 멀고, 적요한 데서 날아와 반짝이고,

 

 


 

 

장이지 시인 / 반복

 

 

 연출 선생이 배역을 정하는 데 골몰한다 모두 폴이기를 바라지만 폴은 한 명이다 나는 폴이다가 니나가 된다 니나는 미륵이 되고 미륵은 폴이 된다 아침에 쫓는 사람이다가 저녁에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편지는 오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편지가 온다 나는 연출가가 된다 모두 폴이 되려 하니 큰일이다 극단 대표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거울 안에서 스핑크스는 부은 발을 주무른다 나는 극단 대표가 되어 연극을 본다 무대 위에서 랭보가 말한다 나는 타자다! 중요한 것은 그뿐이다 나는 타자다, 이 말이 누구의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뱉는다 소년에게 그 말을 해준 것이 바로 나일까 모든 배역을 거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윤회, 모든 사람이 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나, kryptonite 아침에 일어나면 까닭 없이 슬프다 무엇을 잃었는지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는 되찾은 자가 되리라 편지가 오리라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장이지 시인 / 이피게네이아의 꿈

 

 

 "기차에서 내린 단 한 명의 승객은 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누구의 꿈도 아니다" 부정사가 부정하는 것이 꿈이라기 엔 이어지는 이야기가 동화적이에요 거인이 나오고 마법사가 나오지요 문제는 꿈의 소유권이에요 꿈은 그 누구의 것도 아 닌 나의 것이라고도, 꿈은 특정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다수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나의 꿈이면서 동시에 많은 여성 의 꿈 많은 여성이 함께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요? 가령 사령관이 딸을 제물로 봉헌하는 순간 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암 사슴이 놓여 있는 꿈 이피게네이아의 꿈 우리가 이피게네이아가 되는 꿈 이피게네이아가 되어 다시 꾸는 꿈 다수가 같은 악몽을 꾸고 있다면 이 꿈은 단지 꿈일까요, 아니면 지독한 현실일까요? (소녀, 쓰러져 있다 핀 조명) 누가 저 소녀를 죽였 을까요 몇 명이 저 소녀를 죽였을까요 편지가 온다, 편지가 온다 살해되어 지금 여기에 없는 여성에게서 편지가 온다 도대 체 몇 명이 저 소녀를 죽였을까요?

 

*배수아 단편 「노인 울라에서」(2014)

 

 


 

 

장이지 시인 / 졸업

 

 

 너는 그것을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에게 주려던 편지를 흐르는 강물에 버린 것을 네가 알까, 너는 모르지 그것은 흐르고 흘러 지하세계에 이르고, 지하세계의 구중궁궐의 아흔아홉 겹 그늘 속으로 가게 돼 머리가 둘, 팔이 넷인 괴이(怪異)가 그곳을 지켜서 힘이 센 괴이가 그곳을 지켜서…… 끝까지 너는 네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지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나는 앞서고 너는 내 뒤를 따르고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우고 그런 평범한 날들이 있었지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는 손 끝에 매단 실을 놀리고 나는 인형처럼 꽃처럼 흔들린 날이 있었지 네가 떠나면 나는 무엇이 될까 너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 내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뉘앙스의 구름을

 

 


 

 

장이지 시인 / crop circle

 

 

 맥랑(麥浪)이 넘실대고 UFO는 떠난다. 초록이 이글거리고 천공의 눈이 반개(半開)한다. 쓰러진 대원A를 남겨두고 UFO는 떠난다. 맥랑이 이글거리고 대원A가 눈을 뜬다. 보리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쓰러진 자의 화인(火印)이 이글거린다.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는 불굴(不屈)이 넘실댄다. 그러나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금강(金剛)이 눈을 뜨겠구나. 대원A가 금강의 언어를 토해놓고 보리밭을 가로질러 가다 다시 쓰러진다. 맥랑이 되는구나. 지상의 눈이 되는구나. 바람이 불어도 이글거리는 초록의 경전(經典). 쓰러져야, 쓰러져야.

 

 


 

장이지 시인

1976년 전남 고흥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제4회 바움젊은시인상(2012), 제7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현재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  ‘불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