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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찬일 시인 / 차를 끓이며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임찬일 시인 / 차를 끓이며

임찬일 시인 / 차를 끓이며

 

 

내 가슴에서 말라가는 한 봉지의

밍밍한 하루를 끓인다

슬픔이나 쓰라린 일은 녹즙으로 풀리고

부질없이 나부끼던 영혼의 푸른 잎사귀도

마알갛게 우러난다

그래, 죽이라는 것도 목숨을 잘 말렸다가

어느 날 순리의 불을 피우고

말갛게 말갛게 우려낸 한 잔의

찻물이 아닌지

 

이 뜨거운 깨우침을 훌훌 불어 마시며

찻잔 같은 풍경 위에

내 맑은 눈빛을 올려 놓는다.

향기로워라, 가끔씩 생활을 끓이는 시간

한 모금의 명상으로 가슴을 적시며

헛된 욕망을 걸어 잠근 후

그냥 숨이라도 끊어진 듯 슬그머니

일상의 문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

끓이면 끓일수록 우러나는

한 잔 푸른 빛깔을 건져낼 때마다

혀 끝에 쓰게 얹히는 인생의 떨떨한

차를 끓이다가 자꾸자꾸 쏟아버리고 싶은

아직도 덜 마른 내 삶의 잎사귀들

 


 

임찬일 시인 / 그대

 

 

무슨 일 저지른 자리처럼 꽃이 핀다

귀만 크게 열어놓고

두근두근 우는 두견

철쭉도

속살을 풀어 실없이 붉은 그대

 

젖빛으로 벗은 몸을 한 송이씩 접는

단정한 이마 한 뼘

가지 끝에 걸어두고

윤삼월

뻐꾸기처럼 어깨뼈로 울던 그대

 

쌀밥 몇 공기 하늘에다 엎지른 양

푸짐하게 익어가는

아카시아 그늘 아래

이빨만

희게 닦으며 하하 웃고 있는 그대

 

 


 

 

임찬일 시인 / 안경을 닦으면서

 

 

추억이라는 흔적으로 아직도 우는 시간

손등에다 가만가만 눈꺼풀을 문지르듯

세상과 화해하고자 안경알을 닦는다

 

눈물에 가린 듯이 빽빽한 세상 풍경

마음 귀퉁이에 생각도 닦아 보고

행여나 손자국 남을까 투명하게 떠는 염려

 

돌아보면 배경은 죄 아름답게 정해져 있다

뒷그림이 받쳐주는 돋보이는 삶의 앞면

그 모습 다 살리고 싶어 입김으로 닦는 정성

 

먼 것은 멀리 봐야 눈앞인 듯 선명하다

느낌으로 나를 열어야 사랑도 보이는 법

당기고 때로는 밀어야 초점 안에 들어오지

 

세상도 제 눈에 안경같이 맞춰서 보고 싶다

언제나 흐린 바깥 그것마저 닦고 싶다

시간도 함께 늙으면 그때 가서 벗을 인생

 

 


 

 

임찬일 시인 / 물

 

 

한 그릇 맑은 혼을

스스로 엎질러서

몸을 소리로 풀며

내려오는 그대 강림

아마도 맨 깊은 곳은

아주 낮은 자리런가

무자리 발 닿던 곳

손금만도 못한 길을

물레소리 내고 가는

어떤 이의 더듬이여

몇 장단 풍물을 쳐야

사는 일도 흘러갈까

맨살로 돌을 감는

뼈보다 아픈 침묵

그대가 몸을 풀면

한낱 돌도 입이 열려

마침내 노래가 되어

살 속으로 흘러라

 

-시집『내게로 온것들은 눈이 슬퍼라』에서

1986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 당선시

 

 


 

 

임찬일 시인 / 슬픈 커피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 그 시절을

혼자 빠져 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 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느낌으로 커피에게 내 입을 빼앗겼을까

 

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사람은 갖고 떠났다

그와 나눈 한잔의 커피가 이 세상의 가장 진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 내 가슴을 휘휘 저어대고 있다

 

함부로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다 보낼 사람이라면

갈색 이마와 그윽한 눈빛을 한잔씩 마시면서

사랑이 얼마나 슬픈 약속인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뜨겁게 물들이던

슬픈 커피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이 비운 자리를

혼자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시집 <알고말고 네 얼굴>中에서

 

 


 

 

임찬일 시인 / 애인

 

사랑은 왜 첫마디가 눈물이더냐

마음에서 시작된 울음의 말이더냐

서른 아니라 마흔 넘어서도

다 이룰 수 없는 이 울음 같은 사랑을

서로 보태어도 양이 차지 않는

사는 날의 외로움

한 살림 잘 이룬듯 푸르고 무성하던

여름 수풀에도 외로움은 혼자 익어서

몰래몰래 흔들리는 가을 잎사귀들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사랑이더냐

낙엽은 그냥 홀로 물든 마음이더냐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사람이 있어

우리는 그를 두고 애인이라고 말한다

3인칭도 아닌 2인칭도 아닌

내 마음에 물들어 흔들리는 그 잎새 한장을

어쩌면 어쩌면 살아서 가장 슬픈 촌수인

그사람의 이름을 애인이라 말한다

세월의 갈피에서 한 잎 단풍처럼

나만 아는 그 페이지에서 숨어서

아직도 그 사랑을 다 읽지 못한 책처럼

아니, 아니, 참고 참아야 할 눈물같은 모습으로

우리는 등을 돌리고 돌아섰지만

들어라, 세상 사람들아

마주보고 서로 품어 안는 것만 사랑이라더냐

등을 돌려 서로 기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더냐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는 서로 말을 아낀 채

등을 돌린 둣이 가만히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등바닥을 가만히 기대고 있는 것이다

-시집 『알고말고 네 얼굴』(문학촌,1999) 수록

 

 


 

 

임찬일 시인 / 군산일기

살점을 발라낸 고요한 생선의 뱃속처럼

텅 빈 고깃배들이 뼈다귀만 앙상한 모습으로

밤바다에서 흔들리고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생선의 가느다란 헐떡거림을 연상시키듯

늦은 저녁 고깃배에서 퍼 내리는 것은 몇 백 상자의 찬바람

포장마차의 불빛이 꽃밭처럼 환하게 피어 있고

저 건너 장항의 불빛도 따스하게 건너오는

군산 항구의 생선 비늘 쌓인 횟집에서

우리는 농어와 소주를 시킨다

좋은사람들의 이야기처럼 풍성한 해물이

상 바닥을 덮었을 때 이곳의 인심은 몇 배나 넉넉하게

우리를 배불리 채워 주었다 결국 접시를 다 비우지 못한 채

유리창에 붙어 농어처럼 할딱할딱 숨쉬는 바다와

그 위로 건너오는 장항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이 저녁 나는 세상의 누구에게로 건너가는

한 등의 불빛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밤에 불을 보고 길을 찾아가듯이

내 사랑도 그대에게로 가는 어둠의 바다위에서

혼자 깜박거린다 거기 그대가 불처럼 켜 있으므로

-시집 『알고말고 네 얼굴』(문학촌,1999) 수록

 

 


 

 

임찬일 시인 / 해바라기

 

 

얼굴만 좀 볼 수 있다면

목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서 있겠다 여름 날 내내

그대 창가에 내 키를 올리다가

날이 저무는 시간

나는 못내 고개를 떨구지만

환한 불이 들어 온 그대 방 높이로

다시 내 마음을 밀어 올릴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만이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얼굴에서 그리움이 익어 익어

씨를 남기는 이 사랑

오직 발돋움치는 것만이

그대에게로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시집 <못다 한 말 있네>(문학촌, 1999) 중에서

 

 


 

 

임찬일 시인 / 소나기 Ⅱ

 

 

지상의 모든 것들이 더욱 청춘일 때

그들의 영혼이 푸른 잎을 달고 나부끼듯이

나는 너를 갈망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후줄근한 모습으로

단숨에 뛰어 올 수 있겠느냐

참으로 긴 발을 내려딛고 와

너의 중심에서 젖어 버린

이 하얗고도 축축한 영론

누군가의 마음으로 뚜어드는 일이

살아 있는 날의 사랑이라면

기꺼이

내 몸을 받아주겠느냐

나는 네 이마에서 흐르고

손등도 적시지만

그보다는 네 가슴 속에서

콸콸 부서지는 물소리 내며

네 사랑에 섞여 흐르고 싶다

그토록 퍼붓던 내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으냐

 

-시집 <못다 한 말 있네> 중에서

 

 


 

 

임찬일 시인 / 알고 말고, 네 얼굴

 

 

옛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를 들추어내고

그때 가까이서 어울렸던 친구의 이름도 떠올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개라며

나에게 묻는다

기억이 나느냐고

이것저것 지난 세월에 묻은 흔적을 증거삼아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는 이 낯선 절차

그래, 물 같은 세월 흘렀으나 거기에

비추듯 남아 있는 우리들의 코 묻은 얼굴과

남루했던 시절

흑백사진처럼, 아니 아니 눌눌하게 빛바랜

창호지처럼 다소 낡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무렵의 일을 이제는 옛날이라고 싸잡아

네 이름처럼 불러야 되는구나

친구야, 오랜만이다 애들이 몇이고?

그래, 나랑 똑같구나 딸 하나 아들 하나라니 !

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려야만 했단 말이냐

서로 연락도 하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우리들의 기약은 다시 아득해지고

무슨 꿈결처럼 잊혀져서 나는 또

가물가물한 너의 얼굴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

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

 

-1999년 세계일보 신춘 당선작

 

 


 

임찬일(林燦日) 시인 (1955~2001)

1955년 전남 나주 출생. 1983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월간 문학》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1996년 《세계일보》 시부문과 1986년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당선, 같은 해에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당선. 시집 『알고말고 네 얼굴』 『못다한 말 있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 『내게로 온것들은 눈이 슬퍼라』.  장편소설 『임제』. 현대자동차써비스에서 15년간 기획 홍보업무 담당. 간암으로 47세로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