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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희 시인 / 칼 가는 사람
선악 없이 적을 삼고 칼 쓰는 날선 세상 무딘 삶 벼린다고 달인이 될까마는 잘라야 사는 칼의 삶 무뎌진 날 벼린다
뭉툭한 본인 삶은 날 세우지 못했지만 숫돌 닳게 벼려보면 녹슨 삶 날이 서서 여태껏 잘라온 허기 면할 날도 있으려나
누구에게 살기 한 번 품은 적 없는 그가 한쪽 눈 질끈 감고 꼬나보는 허공 급소 외마디 적멸 기합에 무 허리가 동강 난다
-《개화》 2022년 제31호
김광희 시인 / 도마뱀
꼬리가 잘려 돈다 잘린 길이 돈다 지구를 직립해 서서 놀란 눈이 불거지는 동안 사라진 아버지
무저갱의 화석을 떠나 도마뱀별자리로 가는 길은 저 마른 바람과 너무 환해 살벌한, 아뿔싸 심청 꾸러기들에게 들켜 돌팔매에 땅을 당기며 가던 길 잘랐던가 먼 길 떠나기 위해 비명 없이 떼야 하는 몸 절망은 천길 낭떠러지 같은 것 꼬리가 자라는 동안 환상통이 지문처럼 온밤 돌아 쑤셔 가려운 여름밤은 벽이었을
참고 버려야 하는 것은 몸만이 아니다 꼬릴 떼듯 스스로를 떼고 떠난 아버질 잘라내듯 잊어야 한다 그리움이 어둠처럼 몸 푸는 무거운 밤 툭, 한 마디 잘라내면 가볍게 다다른 땅에 잘린 내 꼬리가 웃음꽃으로 피겠지
어둠에서 깨어나 별자리 간 아버지 그 머나먼 길에 잘랐던 많은 꼬리가 푸르게 파닥이며 산길 위에 내린다
길이 자란다
-시인정신 2015년 봄호
김광희 시인 / 바다가 끓이는 아침
냄비 속 두부 비집고 순하게 누운 청어 여태껏 제살 찌른 가시들 다독여서 들끓는 파도 소리로 어린 잠을 깨운다
물 얕은 연안에도 격랑이 일었던지 거친 물살 버티느라 활처럼 등이 굽은 어머니 갈빗대마다 소금 눈물 가득 찼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대양을 꿈꿨던지 시퍼런 등줄기가 심해를 닮아있는, 몸속의 수평선 꺼내 끓여내는 아침바다
김광희 시인 / 외딴섬
기명물통 가득 채운 그릇들 어디가고
남은 식구라곤 공기 하나 수저 한 불
똑똑똑 지는 물방울 밤을 세는 섬 하나
-《개화》 2023. 제32호
김광희 시인 / 홈실 가가 살자
갱빈을 다말러 가가 토째비 나오는 사랑산모랑지 돌아 책보 청마루에 툭 던지면 아배가 대구랭이 맹글다가 '누기래
아랫각단 훈장댁 찬이가 우리 삽지껄에 놀개이 거치 겅중겅중 다말라가면 다리에 감고 가는 숲바람에 나는 절로 두 볼이 볼구족족
소 팔러 간 아배 잡아간 댓고개 백예수는 비만 오믄 서낭에서 귀신 호리는 소리로 휘리리 뺏쪽 등신 거튼 울 어매는 문지방 살짝구틀 부적 쪼가리 벌겋게 덕지덕지 남방인지 서방인지 싸게 오소 두 손 비비 고 또 비비제
'연어가 와 거랑 오르는지 아나 눈물 안 빌라고 그렁 기라, 죽는 날까정 만신창이가 되어도 질로 안 가고 살여울 기럭꼬 오르기라
앞산 애장에 참꽃 만발하믄 어매아배 모시고 오순도순 동두깨미 살자 찬이야 머리는 백당시기 됐는데, 돌산사랑 산 오매가매 뻐꾸기만 떡뻐꾹
김광희 시인 / 주산지를 읽다
안개 피는 못둑에서 점자판을 더듬는다 행간 넓은 수면 넘겨 물의 책 읽어 가면 왕버들 수백 년 역사 만연체로 흔들린다
발 젖은 나이테에 짓뭉개진 장서藏書마다 문장과 물결사이 잉어들 헤엄쳐와 별바위* 눈먼 그림자 아픈 내력 전해준다
가던 길 잃어버린 낮달을 배경으로 이제 막 도착한 연초록 신간들이 꿈꾸는 이름을 달고 윤슬로 글썽인다
*별바위: 주산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위봉우리
김광희 시인 / 쑥 뜯으러 갑시다
지구로 초대된 날 미역국 끓었겠지요 박수요? 그런 말은 어느 사전에 있는가요 끓다가 또 식었다가 가마솥 같은 삶이었죠
무능과 아귀다툼 바닥없는 그 수렁 속 유리천장 너무 멀어 별 보긴 개뿔이죠 그래도 얼어죽을 정 몇 숟갈의 국물 맛
한숨을 끓이다 보면 휘도는 강을 건너 감정은 덜어내고 감성은 담뿍 채워 좋겠죠 도다리쑥국 끓여보는 호사를
-《대구시조》 2022,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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