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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시인 / 오늘 내가 본 들풀
위에서 내려다볼 때도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무리 지어 살아가던 모습 참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지만 눈높이를 낮추고 보니 꿋꿋하게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마디마디 팽팽한 힘줄 비로소 보인다 서로 부둥켜안기도하고 기대기도 하고 받쳐주기도 하고 부르르 온몸을 떨며 이 앙다물고 버티기도 하고
김종원 시인 / 꽃이여! 민주주의여!
죽을 것 같은데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던 피
결국 목숨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멈추었던 붉은 피
시간이 흘러가면 가슴 속을 파고들던 그 써늘한 바람소리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도 한 번도 뉘우치지 않는 야만의 손 야만의 목소리
슬픔이 쌓이고 쌓여 눈물로 쏟아지고
총소리가 울리고 새벽의 고요한 어둠이 비명을 지르고
시간이 흘러가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을 감아도
아직도 그날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길바닥에 나뒹굴던 그 붉은 피 피 냄새가 난다
민주주의여! 꽃이여!
김종원 시인 /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세상을 산다는 게 문득 외로워져 집을 나와 겨울거리를 걸어보니 차가운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그동안 나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두터운 외투에게 고맙고, 외투가 없으면 춥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내 몸에게도 고맙다 사랑에 실패한 후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이별에게도 고맙고, 쓰린 이별 덕분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머리위에서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서 있는 푸른 하늘에게도 고맙다 푸른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흐려져,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느끼며 인생을 산다는 건 행복하다가도, 문득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 하늘에게 다시 또 고맙고 그걸 느낄 수 있게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한다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이 세상은 고마운 것 투성이다
김종원 시인 / 슬픈꽃
길을 가다 만났다 아무도 너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가려진 외진 곳에서 피어나 너무나 밝게 웃고 있어 너를 바라보는 내가 더 슬퍼진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따뜻하게 불러줄 수 있었을텐데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너무나 연약해 보이지만 강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는 꽃이다 밝게 웃고 있어도 왠지 슬픔이 묻어 있어 참 정겨운 꽃이다 너는
김종원 시인 / 길 위에 누워 자는 길
전조등 불빛 사이로 어둠이 찢어진다 안개가 내가 달려가고 있는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불빛이 허공에 매달려 멍하게 내려다보고 그물 속에는 멸치들이 한 덩어리로 엉켜 발버둥 친다 파도소리가 점점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이른 새벽 잠들지 못한 창백한 얼굴들이 몸을 뒤척이고 그물을 털고 있는 사내를 향해 상처 난 비늘과 비린내를 날려 보낸다 입술을 꽉 깨물어도 자꾸만 몸이 떨린다 어둠이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소화되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토해내고 있다 커다란 건물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 옆에 움츠리고 있는 작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큰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점점 작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쯤 나도 보일까 안도 하듯 부신 눈 가늘게 뜨고 담벼락에 기대고 서서 햇볕을 쬐고 있다 자주 길 위에 길이 누워 잔다 익숙한 듯 무표정이다
김종원 시인 / 낙엽 2
무거워져야 할 때와 가벼워져야 할 때를 안다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버텨야 할 때와 깃털처럼 가벼워져 바람이 부는 대로 달려 가고 제자리에 멈춰서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사랑한다는 것도 살아간다는 것도 슬픔과 분노의 시간들 온몸으로 감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을 안다 살아가는 일은 이렇듯 문득 나와 내가 마주보며 조금씩 투명해져 가는 일이란 것을 안다
김종원 시인 / 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면 제일 먼저 스스로 흐름을 멈추는 사람이었다
뼈마디 억센 손끝으로 시냇가 가장자리 곽 움켜잡고 겨울 칼바람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의 두께를 스스로 조절하며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졸졸졸 깨어 있는 숨소리 가슴으로 느끼며 긴 밤 별무늬 이불 하나로
뼈속으로 파고드는
온갖 서러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시간의 상흔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래, 그래 한평생 치마폭에 감싸고 살아오신
어머니가 있다
-시집 <길 위에 누워 자는 길>에서
김종원 시인 / 잡초
뿌리 깊고 넓게 내려 뽑혀도 혼자 뽑히지는 않는다 참 끈질긴 놈이다
뽑아도 뽑아도 얼굴 두껍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또 다시 무리지어 나타나는
놈들.
김종원 시인 / 똥파리는 내 밥그릇 위를 윙윙거리며 날고
욕심이 너무 과한 게 문제였어 내 밥 그릇 위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똥파리들 정확하게 허점을 노려야 하는데 너무 세게 내려치다 번번이 헛손질만 하고 결국 내 밥그릇만 엎어버렸네
다음에는 꼭 잡고야 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똥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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