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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세미 시인 / 비극의 위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박세미 시인 / 비극의 위치

박세미 시인 / 비극의 위치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입니까

태풍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휘돕니까

숲속 오후 기분 좋은 토끼처럼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언제나 눈꺼풀처럼 박입니까

 

당신이 내게 다다르는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므로

이불을 펄럭이고

형광등을 켜고

꾸벅꾸벅 좁니다

손에 든 펜이

당신의 좌표를 점치는 동안

 

오늘은 먼지를 잔뜩 마셨습니다

먼지의 성분을 헤아려보면서···

당신이 포함되었다는

폐에 파고든 당신을 영원히 배출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깨끗하게 씻긴 폐를 양 날개 삼아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돌연

날개가 거침없이 부풀어 오를 떄

나는 당신과 동시에

터지길 바랍니다

 

-『현대시』 2024-7월(415)호

 


 

박세미 시인 / 고국

 

 

 탯줄이 끊어졌어요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지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어요사람들은 단지 울음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고국에 돌아가듯 매일 화장실로 돌아가요가족과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애인과 사랑을 나눈 뒤에도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면 나의 몸이입김으로부터 자꾸 모호해져요완벽한 알몸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은나의 작은 에덴

 

 낯선 이곳에서 낮술을 하는 것은내가 고국의 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에요

 

 여긴 시계소리가 가득하지만 완벽한 시간은 없어요밤을 분절시키는저 작은 시계바늘 하나도 나는 어쩌지 못해화장실로 돌아가 변기에 앉아요

 

 꾸벅꾸벅 졸음을 떨어뜨리며고국의 밤을 꿈꿔요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전해지는 것은 낙서뿐이다

 

 


 

 

박세미 시인 / will

 

 

처음 보게 될 아이의 눈동자를

그리워해왔다

나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일 것이다

 

흰부엉이

날개를 푸드덕거릴 때마다 수북이 쌓이는 깃털만큼

기억들은 아름다워졌고 자꾸

'습관'이 나를 품에 안고는 아기처럼 침대까지 옮겨다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흰 부엉이가 보는 앞에서 죽으려고,

죽으려고 했지만 매번 살아났다

'잊었어'라는 말은 이미 무의미하기 때문에

 

'미래'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미래에는 흰 부엉이가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나의 두 손을 미래에 두어

아이의 머리를 땋아줄 것이다 나의 손가락도 같이 엮어서

돌아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내일은 나의 눈동자를 빼다가 미래에 심어둘 것이다

미래의 나를

'아직'이라는 도착하지 않은 무능을

알아보지 못하게

 

-시집 <내가 나일 확율>에서

 

 


 

 

박세미 시인 / 신앙생활

 

 

다리를 벌리세요

아이처럼 매달리세요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오늘 씨앗을 심고

잎이 쏟아져나오는 여름 나무를 기다립니다

나는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요

 

매일매일 예배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새하얀 그림자를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요

 

그분의 숨소리에 나는 점점 예민해집니다

내가 정결한 신부가 되었을 때

우리의 호흡이 일치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젖은 몸으로 춤을 춥니다

천국의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그런데 자매님,

발끝으로 춤을 추어도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발레리나는 얼마나 오래 허공에 매달릴 수 있습니까

그녀는 매일 밤

수많은 종류의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습니다

 

 


 

 

박세미 시인 / 빛의 구호

 

겨울비가 오는 밤거리를 걷던 그

발걸음을 멈춘다

멀리 어떤 창문이 깜박, 까 - 암 - 박, 깜 - 박인다

빛의 리듬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발로 빛의 길이를 외우면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는 집에 돌아와 누워

입으로 빛의 외침을 씹는다 씹어서

삼킨다

잠이 든 그가 점멸한다

당신에게

자신을

던지기 직전

 

 


 

 

박세미 시인 / 중정

 

 

빈 뜰을 보았다

 

뻥 뚫린

주택의 한가운데

빛이 담기고 흰 구름이 닫기고

가끔 내가 담겼다

 

투명한 기둥이

가득찬 구멍이 될때

 

고개를 젖히고 두눈을 감을 수있다

가만히

 

슬픔이 깃든다

 

내 집엔 함부로 들락거렸지만

내 뜰은 절대 침범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두손으로 얼굴을 감쌀수 있다

조용히

웃는입

 

해가 떠나고 새가 떠나고

가끔 내가 떠났다

 

뜰을 비운다

 

중정의 한가운데

좁고높은 어항을 하나 농고서

기다린다 호우를

 

아가미는 생기지 않았고

젖은 내가 쏟아져 나왔다

가장 사적인 순간에. 가끔

 

 


 

 

박세미 시인 / 뜻밖의 먼

 

 

거울을 깬 적이 있지

누군가 불길한 징조라고 말해주었고

그날 이후 나는 그릇도 깨고 화병도 깨고

날카롭게 조각난 것들을 주우며

우연이라고 믿으며

 

긴 장마가 끝났어

숲의 입구에서 나는 나의 발을 한번 보았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만 가자

깊고 연약해 보이는 땅만 밟자

진흙 속으로 오른발이 쑥 빠질때

내버려두자

더 깊이 빠뜨리며

기다리자

머리 위로 새똥이 떨어질 때까지

멀리서 거울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무릎까지 차오른 진흙이

온몸을 뒤덮을 때까지

 

내게 가장 재수 없는 일은

 

당신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일까

당신이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는 것일까

 

 


 

박세미 시인

1987년 서울에서 출생, 강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석사과정. 2014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가 나일 확률』, 『그래, 사랑이 하고 싶으시다고?』(공저), 등. 월간 <SPACE>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