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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란 시인 / 수국의 造化
점잖게 안달 난 꽃 색이야 초록 바다에 떠 있는 하얀 무덤들을 봐 천년을 지켜온 한 떨기 弔花 같아
네가 처음으로 뿌리내린 흙에서는 분홍이 올라왔지
어느 날 흐려진 꽃대 툭 잘라내자 계절은 부푸는 색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어
위태로운 소리를 삼킬 때마다 잎이 마르는 건 용도가 파기된 꽃말의 처세 저기 저 파랑 엉덩이를 봐 붉게 피던 절기가 겹겹 색을 바꾸고 있어
분홍 떨기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세요 만년의 기도는 땅속으로 스미고 초록의 내력을 아는 흙은 보랏빛으로 냉정했지
그래, 이것이 너와 나의 사랑이었던 게야 분홍으로 와서 파랑으로 번지고 보라로 가라앉더니 하양으로 지고 있어 우리 뜨거움의 온도가 달라지고 있던 게야
그래, 이 모든 색의 조화가 자주 변하는 내 배꼽의 농도 때문이었던 게야
유금란 시인 / 신혼여행
괌 실탄사격장 주인은 총알값부터 내라고 했다
계급장이 있던 자리에 낡은 웃음이 지나갔다
귀를 막고 안전줄을 믿어보세요 총은 쏘는 게 아니라 잡아당기는 겁니다
안전줄이 목숨 줄로 들렸다
목숨 줄을 쥐고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저격수가 되는 안내문이 달콤하다면 오늘쯤은 없애볼 만하다는 거다
본 적 없는 생각과 본 적 있는 눈코입이 한 줄로 꿰어졌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의 방향과 돌이킬 수 있을 만큼의 거리
사랑은 붙잡는 게 아니라 위험한 방아쇠를 내 심장 쪽으로 당기는 것 내가 먼저 숨을 멈추는 것
손끝에서 얼음이 부서지고 멈춘 숨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따당 탕 탕 탕
아름다운 신부가 사라졌다 노래가 사라졌다 이름이 사라졌다 어제가, 오늘이, 한순간이 사라졌다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이 코앞에서 흔들거렸다 화약 냄새 자욱한 검붉은 밀실에서 그렇게 내가 죽었다
고작 미화 60달러에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제2회 동주해외신인상> 유금란 시인 / 여름 우박 때 아닌 저 육각의 결정은 하늘이 땅을 만나기 위해 찾아낸 방식이다. 계절 몰래 구름을 훔쳐낸 바람의 도발이다. 봄을 시샘하다 천둥 속에 갇혔던 겨울의 탈출이다. 기다림을 버리고 푸른 잔디 위에서 꽃으로 피려는 성급한 욕심이다. 나는 구름이 우박으로 변하는 지점을 보지 못했다. 투명을 하양으로 바꾼 물의 변신은 빠르게 낙하할 뿐, 순간의 어떤 탄성도 갖지 못한다. 닿고 싶은 간절함만이 기온의 변덕을 알아챌 뿐이다. 무게를 얻은 낙화가 바람의 붓끝에서 점 점 점 빨라진다. 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는 여름 땅이 뜨거워서다. 그것은 처음 차오른 절정이고 마지막 남은 교성이다. 땅이 살갗을 뒤틀어 올리며 터지는 산화. 잠시 공중에 머무는 망설임은 뒤이어 부서질 이름의 조각난 종교이다. 풀 밑을 기던 벌레 한 마리 고요하다. 겨울을 모르는 미물에게 초록은 하늘의 전부, 오늘 일용한 비가 내렸다. 찰나의 꽃이 되려고 다시 내려앉는 하늘 무더기. 우주의 기를 모아 차가운 정열이 핀다. 이 여름은 당신이 가벼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계절의 끝에 서 있는 레몬 나무가 향기를 잃으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오래 머물기 위해 욕망을 밟는다. 깊이 스미려고 꽃이 녹는다. 유금란 시인 / 감옥 소설 축하 파티가 있던 날 애보리진과 죄수의 거처가 울던 날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바람이 번쩍거리고 배 없는 선착장에 검은 조짐이 쏟아져 내리고 노란 잔디에 박힌 하얀 아이가 자두 빛 웃음을 흘리고 더운 구름이 초록 풍선에 매달려 구겨지며 사라지고 예약된 시간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마주한 속수무책, 갇힌 것은 환한 세상의 우리였고 흐르는 것은 문 안의 검은 입이었다 시인 P가 와인 잔을 들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문고리가 흔들리길, 흔들려 깨지길, 한 가지 주문에 두 개의 메타포가 흐르자 적절한 이유를 갖지 못한 시어들이 잔 속으로 뛰어들었다 건배! 산 자의 명복을 빌며 잔을 비웁니다 건배! 거래는 성사되었고 이 잔에는 독이 없어요 이런 데자뷰, 욕망에 절인 심장을 덧대고서야 이해되는 장면과 노을 지는 초저녁 지평선에 머문 황금 전봇대의 생마저 질투했던 시인의 기록들*, 시인이 되고 싶은 내가 담백하게 만질 수 있는 시어는 대체 얼마나 될까 주문이 시들면서 시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잔치는 그렇게 문밖에서 벌어졌고 잔치의 끝을 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설가의 날 선 직유가 회오리를 남기고 떠났다 마을이 칠흑 속에 갇히고 프라다와 니콘을 품은 모나리자 가방이 맥도널드 불빛 아래에서 사라졌다 모나리자를 찾아 나선 수필가들이 형체 모를 소문에 농담처럼 끌려다녔다 부푼 그림자에 목 졸려 죽기에 딱 좋은 누구나 검은빛으로 익어가는 밤이었다 원혼을 달래야 해, 메이틀랜드 감옥의 마지막 사형자 찰리**를 위한 묵념을 빼고 춤을 춘 당신들, 이제 시인 흉내 그만 내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찰리부터 빼내 주게, 문고리를 쥔 동화 작가의 메시지가 어둠을 밀어냈다 감옥 명 : 어제 오늘 내일 *** 비밀번호 : 201810 비로소 감옥 문 첫 페이지가 열렸다 * 심보선『한때 황금 전봇대의 생을 질투하였다』에서 차용. ** 1897년, 메이틀랜드 감옥의 마지막 처형자였던 찰리 하이네스는 숨이 멎는 순간까지 무고를 부르짖었다. 테레사리 단편 ‘유령이 내게 말을 걸었을 때’에 등장한다. *** 애보리진과 죄수의 감옥 역사를 소재로 한 시드니 소설가 테레사 리의 소설집 제목이다.
유금란 시인 / 코드리스 먹구름에 걸린 오후가 흔들립니다
결너비가 일그러지는 것은 변조된 주파수 때문
얼마나 많은 금을 넘어야 제 선에 닿을 수 있을까요
공중의 속내에 어두운 나는 먼 곳에서 오는 당신의 표정을 귀로 찾습니다
찬바람이 진흙처럼 엉기면 기다리던 소식이 와전되지요 귓속에서 부푸는 붉은 숨결
안에서만 단단해지는 내밀한 온도가 내게는 없어 눈동자는 자꾸 밖으로 자라고 동심원을 그리던 안녕이 정수리 위에서 툭 끊어집니다
이제 더는 바람의 물기를 찾아 날아가는 날개 달린 것들의 무표정에 대하여 질문할 수 없습니다 허공에서만 잘 자라는 꽃이었는지요 제 목소리가 눈물의 서식지인 것을 모르고 꽃이 저절로 핀다고 생각하는 당신 지금 어디쯤 와 있나요 흔들림의 징후는 뚜렷하고 찬 기류에 서툰 나는 허겁지겁 불안을 녹입니다
유금란 시인 / 달링하버에서 사랑하고 키싱 포인트에서 헤어졌다 네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닿는 그리움이 있다 항구에서는 토요일마다 축포가 터진다 달링하버 이토록 다정한 이름을 가진 항구가 있다니 낭만적 사랑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에 온 것 같다고 하자 저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키싱 포인트도 있다고 너는 말했다 살아보니 이 도시는 달링이 커피만큼 흔한 곳이다 굿모닝 달링 헬로우 달링 탱큐 달링 쏘리 달링 키스미 달링 굿바이 달링 정작 달링 천국에 와서 너와 나는 한 번도 서로를 달링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나는 그걸 이제야 생각해 낸다 어제도 나는 키싱 포인트 로드를 타고 교회에 다녀왔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내 입술 끝에서 부서지던 너의 바다가 출렁인다 달콤하면서 날카롭게 더 아래로 떠밀려가며 불길하게 흘러내리던 키 싱 포 인 트 땅과 물이 이름을 얻는 시대였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 파라마타 강을 타고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더 먼 서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강바닥이 얕아졌다 위험을 감지한 남편은 이곳에서 진한 키스를 한 후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바닥이 보이면 위험해진다 우리의 바닥은 어디서부터 였을까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던 달빛 아래 맹그로브 숲을 지날 때였을까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떠나기 전에 하는 키스가 가장 깊고 붉다는 걸 아직도 나는 네가 남기고 간 비밀 편지 같은 마음을 뜯지 못하고 있다 열 수 없는 마음은 없는 마음이다
유금란 시인 / 화이트 클리프*
더는 갈 곳이 없어 서로를 깎아 절벽을 만든 바다가 있다
해안선은 오래 비워 두었던 당신처럼 하얗게 굳어 있고 나는 멀리서 더 잘 보이는 당신을 기다리며 절벽에 앉아 꿈을 꾼다
감긴 눈 속으로 아픈 어금니가 소리 내며 떨어지고 당신의 문장들이 오래도록 미끄러진다
문장들의 꿈은 기다림 속에서 완성되는 밀어들 모호한 말들이 별이다가 모래 사막이다가 붉은 세모 지붕 위로 사라지는 연기이다가 앞에서 멀어지는 얼굴이 절망의 등을 읽어 낸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은 늦었다는 말의 페르소나 다른 표정을 보려고 이방의 섬 끝까지 걸어왔다는 말은 끝내 모양을 만들지 못하고 잴 수 없는 거리를 하얀 절벽에 걸어 두고 오는 길 바람의 충고에 물기가 서린다
어떠한 질문도 피해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당신 앞에서 바다는 더없이 투명에 가깝다 * 화이트 클리프: 영국 남동부 끝에 자리한 항구도시 도버 인근에 있는 하얀 절벽 계간 『시작』 2022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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