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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숙 시인 / 저녁의 발생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이미숙 시인 / 저녁의 발생

이미숙 시인 / 저녁의 발생

 

 

나무들이 서로 촘촘히 끌어안고 싶을 때 저녁이 온다

들판의 까만 염소 울음소리 놓쳐서 저녁은 온다

한낮의 소란도 저물고 저물어서

온통 검보랏빛이어서

안을 들키지 않도록 우리는 불을 꺼야 하나

사랑하는 만큼 멀어져야 하고

얼굴 만지며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사과라 하고 너는 사탕을 그린다

빗물에 푸른 잉크 번지듯 베개를 점령하는 숱한 오해들

꿈속에서는 마음껏 달려도 숨이 차지 않을 거고

별들은 누가 보지 않아도 반짝일 거다

나무들은 굳게 제 자리를 지키고

파스텔화처럼 가장자리가 모호해진

지금은 어디나 저녁이다

 


 

이미숙 시인 / 나목裸木

 

 

 줄기차게 잠비 내리던 칠월의 아침, 내게 넘치도록 꽃을 달아주고 그리하여 세상의 중심으로 나를 끌어들인 그대가, 다 주고도 늘 미안해하던 그대가

 

 마른 꽃 한 다발을 건넨다

 긴 호흡하고 뒤돌아서서

 별이 아름다운 것은 적당히 먼 거리에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는데,

 

 마침 내 것이라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버리던 중이라 담담하게 그 꽃을 받아든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별은 산뜻해야 하니까

 

 또 다른 계절의 길목에서 옷 벗은, 육체를 고뇌하다가

 머지않아 회한처럼 근질거리는 살갗에 푸른 피돌면 나는 또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거기, 오래 멈춰 서 있겠다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에서

 

 


 

 

이미숙 시인 / 사랑 1

 

 

너는 꽃 해

 

내가 꽃받침 할게

 

-시집 『나비 포옹』 (애지, 2020)

 

 


 

 

이미숙 시인 / 오카리나 부는 남자

 

 

머리가 긴

그 남자의 언덕에는

열 살배기 아이와

푸른 음률 따라

새들이 몰려와 함께 산다

아웅다웅 바람이 함께 산다

둘이 마주 누운 침실로

늦과일처럼 야문 햇살 굴러 들어오면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리는

그 남자의 아침은 삐걱거리고,

어린 신부를 달래지 못해

그가 끌고 온 시간들은

속 꽉 찬 어둠이었다

구멍 숭숭 뚫린 자유였다

아이의 씩씩한 잠 다칠까

가만가만 이불깃 눌러 덮어주고

그 남자,

밥을 짓거나

숙제를 돕는 동안만은

부러 머리를 묶지 않는다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에서

 

 


 

 

이미숙 시인 / 빈들

 

 

풀포기 헤치듯 머리를 헤치며

가을은 날을 세우고

낙엽은

베일까 두려워 거꾸로 파묻힌다

 

버거운 삶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어도

그 길에서 꽃을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슬픔이 배어있는 그의 웃음

귓등으로 흘려보고

 

허수아비 없는 빈 들에

수런수런 빛살 받은 낙엽은

내 몸에 붙은 한기를 털어내려

모닥불을 지핀다

 

 


 

 

이미숙 시인 / 화해

 

 

멀쩡한 참말에 어깃장을 놓는다

잊어버렸던 기억

되새김으로 아웅다웅 대꾸를 한다

자질구레한 싸움에

미운 정 한 움큼 더하고

따뜻한 어우름으로

서로의 마음을 꾸며

고운 정 한 움큼 더한다

은밀하게 가렸던 벽이 허물어지고

냉랭했던 안방에 온기가 돈다

묵은 감정 싹 씻고

보듬어 재운다

 

 


 

 

이미숙 시인 / 엄마의 봄

 

 

봄을 캔다

짙어진 나물 냄새

코가 벌름거린다

바람이 옷깃을 툭 치고 지나간다

꽃잎이 발등에 앉았다

열여덟 엄마의 시간에

꽃신을 신고 말을 건다

자잘한 소리들이 주변을 맴돈다

잡초는 때를 가려 올라오고

빈둥거리던 호미

엄마 손에 이끌려

해가는 줄 모른다

 

 


 

 

이미숙 시인 / 집 속의 집

 

나나니벌 일가

안방 바깥쪽 발코니에 흙집 한 채 지었다

계약서 한 장 주고받은 적 없는데

아예 살림을 차린 모양새다

월세라도 지불하듯 창틀에 꼬깃꼬깃

때 묻은 단풍잎 지폐 몇 장

앞뒤 없이 망치부터 들어보지만

빠듯이 몸 들고 날 문 두 짝

마치 깊고 검은 눈 같아서

그 눈빛 비루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해서 순간

삼 층 높이까지 진흙을 물고 와

이토록 단단한 집을 지은 것이나

어찌어찌 우리 식구들

이 집 장만하여 모여 살기까지

가상한 노력들이 교차해 떠오르는 것이다

슬그머니 망치 든 손을 내린다

세력이 미미해 보이는 바다

갓난아이 주먹만 한 작은 집이라

내 침실 침범해 들여다보고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야

창 하나 사이에 두고

팽팽한 두 가구

한 철 더불어 살아보기로

​​

-시집 『당신의 심장은 너무 멀어 새빨갛다』 (신생,2024)

 

 


 

 

이미숙 시인 / 아직 끝나지 않은

 

 

하필

이름도 모를 들꽃들이

왜성 한구석에 다닥다닥

바람자락이나마 잡겠다

땅을 끌어안은 채

얼굴만 내밀어 떨고 있다

 

온몸을 휘감는 젖은 그리움

살품 가득 안겨 오고

칼날 같은 잡초가

지친 걸음을 붙잡는다

기나긴 세월 지나 만났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은 아닐까

애써 귀 기울였으나 그저 붙들고만 있다

오랜 기다림에 말을 잊었음이야

그저 붙들고만

 

서생포성을 떠돌던 바람

들꽃을 어루만지다 산 아래로 구른다

오래전 파도 소리에 잠들었을

바다 마을 주인들

그 세월만큼 멀어진 바다를 그리워하는

침묵의 통곡들

굴곡진 한(恨), 한 올 한 올 풀어헤쳐

바다로 가거라

 

 


 

이미숙 시인

1965년 충남 논산 출생. 충남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 2007년 《문학마당》 겨울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 『나비 포옹』 『당신의 심장은 너무 멀어 새빨갛다』. 한국작가회의, 충남시인협회, 유라시아문화연대 회원, 대전윈드오케스트라 단원, <젊은시>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