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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시인 / 저녁의 발생
나무들이 서로 촘촘히 끌어안고 싶을 때 저녁이 온다 들판의 까만 염소 울음소리 놓쳐서 저녁은 온다 한낮의 소란도 저물고 저물어서 온통 검보랏빛이어서 안을 들키지 않도록 우리는 불을 꺼야 하나 사랑하는 만큼 멀어져야 하고 얼굴 만지며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사과라 하고 너는 사탕을 그린다 빗물에 푸른 잉크 번지듯 베개를 점령하는 숱한 오해들 꿈속에서는 마음껏 달려도 숨이 차지 않을 거고 별들은 누가 보지 않아도 반짝일 거다 나무들은 굳게 제 자리를 지키고 파스텔화처럼 가장자리가 모호해진 지금은 어디나 저녁이다
이미숙 시인 / 나목裸木
줄기차게 잠비 내리던 칠월의 아침, 내게 넘치도록 꽃을 달아주고 그리하여 세상의 중심으로 나를 끌어들인 그대가, 다 주고도 늘 미안해하던 그대가
마른 꽃 한 다발을 건넨다 긴 호흡하고 뒤돌아서서 별이 아름다운 것은 적당히 먼 거리에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는데,
마침 내 것이라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버리던 중이라 담담하게 그 꽃을 받아든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별은 산뜻해야 하니까
또 다른 계절의 길목에서 옷 벗은, 육체를 고뇌하다가 머지않아 회한처럼 근질거리는 살갗에 푸른 피돌면 나는 또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거기, 오래 멈춰 서 있겠다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에서
이미숙 시인 / 사랑 1
너는 꽃 해
내가 꽃받침 할게
-시집 『나비 포옹』 (애지, 2020)
이미숙 시인 / 오카리나 부는 남자
머리가 긴 그 남자의 언덕에는 열 살배기 아이와 푸른 음률 따라 새들이 몰려와 함께 산다 아웅다웅 바람이 함께 산다 둘이 마주 누운 침실로 늦과일처럼 야문 햇살 굴러 들어오면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리는 그 남자의 아침은 삐걱거리고, 어린 신부를 달래지 못해 그가 끌고 온 시간들은 속 꽉 찬 어둠이었다 구멍 숭숭 뚫린 자유였다 아이의 씩씩한 잠 다칠까 가만가만 이불깃 눌러 덮어주고 그 남자, 밥을 짓거나 숙제를 돕는 동안만은 부러 머리를 묶지 않는다
-시집 『피아니스트와 게와 나』에서
이미숙 시인 / 빈들
풀포기 헤치듯 머리를 헤치며 가을은 날을 세우고 낙엽은 베일까 두려워 거꾸로 파묻힌다
버거운 삶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어도 그 길에서 꽃을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슬픔이 배어있는 그의 웃음 귓등으로 흘려보고
허수아비 없는 빈 들에 수런수런 빛살 받은 낙엽은 내 몸에 붙은 한기를 털어내려 모닥불을 지핀다
이미숙 시인 / 화해
멀쩡한 참말에 어깃장을 놓는다 잊어버렸던 기억 되새김으로 아웅다웅 대꾸를 한다 자질구레한 싸움에 미운 정 한 움큼 더하고 따뜻한 어우름으로 서로의 마음을 꾸며 고운 정 한 움큼 더한다 은밀하게 가렸던 벽이 허물어지고 냉랭했던 안방에 온기가 돈다 묵은 감정 싹 씻고 보듬어 재운다
이미숙 시인 / 엄마의 봄
봄을 캔다 짙어진 나물 냄새 코가 벌름거린다 바람이 옷깃을 툭 치고 지나간다 꽃잎이 발등에 앉았다 열여덟 엄마의 시간에 꽃신을 신고 말을 건다 자잘한 소리들이 주변을 맴돈다 잡초는 때를 가려 올라오고 빈둥거리던 호미 엄마 손에 이끌려 해가는 줄 모른다
이미숙 시인 / 집 속의 집
나나니벌 일가 안방 바깥쪽 발코니에 흙집 한 채 지었다 계약서 한 장 주고받은 적 없는데 아예 살림을 차린 모양새다 월세라도 지불하듯 창틀에 꼬깃꼬깃 때 묻은 단풍잎 지폐 몇 장 앞뒤 없이 망치부터 들어보지만 빠듯이 몸 들고 날 문 두 짝 마치 깊고 검은 눈 같아서 그 눈빛 비루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해서 순간 삼 층 높이까지 진흙을 물고 와 이토록 단단한 집을 지은 것이나 어찌어찌 우리 식구들 이 집 장만하여 모여 살기까지 가상한 노력들이 교차해 떠오르는 것이다 슬그머니 망치 든 손을 내린다 세력이 미미해 보이는 바다 갓난아이 주먹만 한 작은 집이라 내 침실 침범해 들여다보고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야 창 하나 사이에 두고 팽팽한 두 가구 한 철 더불어 살아보기로 -시집 『당신의 심장은 너무 멀어 새빨갛다』 (신생,2024)
이미숙 시인 / 아직 끝나지 않은
하필 이름도 모를 들꽃들이 왜성 한구석에 다닥다닥 바람자락이나마 잡겠다 땅을 끌어안은 채 얼굴만 내밀어 떨고 있다
온몸을 휘감는 젖은 그리움 살품 가득 안겨 오고 칼날 같은 잡초가 지친 걸음을 붙잡는다 기나긴 세월 지나 만났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은 아닐까 애써 귀 기울였으나 그저 붙들고만 있다 오랜 기다림에 말을 잊었음이야 그저 붙들고만
서생포성을 떠돌던 바람 들꽃을 어루만지다 산 아래로 구른다 오래전 파도 소리에 잠들었을 바다 마을 주인들 그 세월만큼 멀어진 바다를 그리워하는 침묵의 통곡들 굴곡진 한(恨), 한 올 한 올 풀어헤쳐 바다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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