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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 / 기억의 집
바람 소리 세차다 현관 등이 켜진다 이 깊은 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산등성이 집 때맞추어 비 내린다는 시우리時雨里 산간마을에 시간의, 아주 먼 데서부터 누군가 찾아온 듯 현관의 센서 등이 저절로 깜박이고 있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더 깊은 속엣말을 찾지 못한 새들의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울리는 차임벨 소리 망연히 눈 감으면 한 떼의 새들의 텅 빈 눈자위 가득 드라이아이스로 떠다니는 밤구름들 아득히 바스러지는 마른 꽃잎 같은 기억들 사이로 시간의 청결한 눈目들이 밤의 등빛 속을 위태롭게 난다. 산약山藥 같은 비 냄새 흠씬 풍긴다
김명리 시인 / 녹우綠雨
4월의 비는 채 꽃송이 벌지 않은 백합나무와 아직은 연푸른 낙우송落雨松, 몰아올 낙엽과, 침엽의 두근거림 사이에서 시작되지
청도 지나는 봄빛, 헐티재 너머 각북*에 내리는 저 실핏줄,
송화 가루에 눈시울 붉어진 나비 걸음으로 내 섰는 여기는 연두에서, 잎잎 초록으로 넘어가는 강물의 세찬 굽이 속이라네
물머리 돌아 흐르는 꽃 붉은 산비탈 밀집모 눌러쓴 홍안紅顔의 백수광부여 늙은 몸이 맥없이 휘청거리는 아스라한 벼랑 끝끝까지 넘치게 술잔 기울이는 저 봄빛,
다시는 떠나보내지 않으리 단단히 묶어두리, 저 봄빛! 상처의 응이마다 아픈 내몸을 거기 누이리
슬픔이여, 하룻밤도 돌아눕지 않으리
*각북 : 청도군의 한 면소재지
김명리 시인 /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휘젓던 꽃샘바람 그치고 볕 좋은 날 잘 익은 너르바위에 식탁을 차린다 인적 드문 이 곳, 금빛골짜기 유릉 숲 사이론 푸른 해오라비 날고 물소리가 해묵은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아무래도, 덮쳐오는 봄빛은 치한의 눈빛처럼 이글이글해 만개한 산철쭉 두근거리는 바위틈으로 나 돌아간다 먼저 온 슬픔이 엿볼세라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채 더 깊이 바위틈으로 밀어넣는다
앗!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은둔하는 하루살이들이 개미 떼들이 바위 속을 온통 하얗게 누비고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바위 속으로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또 한 그루 망개나무를 심는 일 해 넘어가기 전에 불멸의 식탁을 차리는 일
내 마음 더 바삐 서두르며 그들의 신작로에 닿기도 전에 일몰의 고단한 꽃씨들이 몰려오고 몰려가고 망개그늘 아래로 가파른 둥근 물소리들 잠 없는 봄밤의 드높은 물보라로 치솟고 있으니
김명리 시인 / 산노을
또 저 텅 빈 허공의 호적부에 붉디 붉은 노을이 오고
死産한 내 아이들의 단 한 번도 소리내어는 불러보지 못한 차디찬 이름처럼
이 저녁 돼먹지 못한 슬픔이 쐐기처럼 가슴에 와 단단히 박힌다
발 푹푹 빠지는 허공의 애장터마다 나 말고 또 누가 내다버린 후레자식들이 지천이어서
구만리 장천 저 시퍼러니 말라붙은 젖꼭지들에 보란 듯 왁자하니 핏물 도는가 오래된 슬픔도 탕약처럼 써서
산비알 웅크린 天南星 잎새마다. 선혈의 핏방울 돋아나는가
김명리 시인 / 세월이 가면서 내게 하는 귓속말
나를 울려놓고 너는 내가 안 보인다고 한다 이 깊은 울음바다 속을 헤매 다니는 날더러 바람소리라고 한다 해가 가고 달이 가는 소리라고 한다 나를 울려 놓고 울려 놓고 가을나무가 한꺼번에 제 몸을 흔드는 소리라고 한다 수수 백년 내 울음소리 위에 턱 괴고 누워선 아무도 없는데 누가 우느냐고 한다 설핏한 해 그림자 마침내 떠나갈 어느 기슭에 꾀꼬리 소리 같은 草墳 하나 지어놓고선 어서어서 군불이나 더 지피라고 한다 새하얗게 이불홑청이나 빨아놓으라고 한다
김명리 시인 / 유행流行
흐르고 싶었네 엷어진 길들이 무더기로 꽃잎을 져나르는 새로 세 시의 매운 산울음 그대로 헝클며 나란히 나즉히 엎드리고 싶었네 흐르고 싶었네 이리 밀리는 미닫이 새와 저리 열리는 여닫이 새와의 그 엇물림의 자리 달빛에 물빛에 닳아질 때까지 오너라 굽이치는 저 강물 속으로 나란히 나즉히 업드리고 싶었네
김명리 시인 / 그 곳엔 아직 아무도 닿지 않았다
그 곳엔 아직 아무도 닿지 않았다 시월 햇빛이 누군가의 울음을 떠메고 이르고자 했던 그 곳. 부러진 옥수수 텅 빈 꽃대궁 속을 가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내 안의 풀벌레 울음소리 아직은 풀빛 짙은데
아아 그곳에 가 닿으려는 누군가의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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