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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윤숙 시인 / 길 끝의 집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홍윤숙 시인 / 길 끝의 집

홍윤숙 시인 / 길 끝의 집

 

 

놀이

 

날이 새면 우리들은 다시 떠났다

길은 끝없이 멀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도보로 걷는 일에 지친 날들을

힘겨워 무수히 쓰러지던 길

어느덧 그 먼 길 다 끝나가고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끝이 보인다

노을 묻은 회양목 덤불 넘어 햇살 바른 들길

남은 두어 굽이 돌아가면

바로 내가 당도할 나의 마지막 집 한 채

마른 풀밭에 화강암 깎아세운 문패가 보인다

그 먼 길 끝에 서 있는 희망

어느덧 함께 가던 사람 먼저 가서

돌문 세우고 울타리 쳐놓고 기다리는 집

길 끝에 내 희망 남아 있으니

마른 살 훈훈히 춥지 않으리

 

무서리 하얗게 옥양목 휘장치고

삭신 마디마다 뼈 삭는 소리 들리는 밤에도

 


 

홍윤숙 시인 / 골목 안 풍경(風景)

 

 

그 골목엔

사철 유리문 덜컹거리는

야채가게와

신기료 할아버지의

노점(露店)이 있었다

 

테레지아 성당에선

주일(主日)마다 울리는 맑은 미사소리

목소리 우악하신 장신(長身)의 신부님이

이따금 거목(巨木)처럼 골목 밖을

내다보셨다.

 

세상은 완벽한 신(神)의 풍차(風車)

아침이면 삐걱대는 생활의 문소리

골목을 열고

한낮이면 셀로판지에 싼

한 포기 꽃으로 잠드는 골목

 

그 골목에

20년 뿌리내린

나도 변함없이 생활을 쪼아온

빛의 석수(石手)다

 

 


 

 

홍윤숙 시인 / 급행열차로 1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온

서쪽 베타니아 마을에선

때마침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낯선 술집과 어둠이 줄지어 선 땅엔

올리브나무도 작은 나귀도 보이지 않고

무수히 지나온 간이역

내릴 수 없었던 미지의 땅에

점점이 피어 있던 해바라기 달리아

그 원색의 빛깔들만 등뒤에 선연했다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와도

그 마을의 일몰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천천히 걸어온 이보다

쓸쓸한 일몰의 시간이 좀 길 뿐이었다

 

 


 

 

홍윤숙 시인 / 급행열차로 2

 

 

멀리서 바라보는 불빛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이따금 몇 개의 별들이

남몰래 그곳에서 밀송되어오고

가보지 못한 어린날의 보물섬도

그 속에 있을 것 같아

깜박 사는(生) 일도 잊어버리지만

 

언제나 밀봉된 마지막 밀서는

내 것이 아니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등 떠밀리며 떠밀리며 흘러가는 밤

한 꺼풀 얇은 미농지에 싸인

세상의 저편에선 밤새 비 내리고

사십 년 떠돈 마음의 방주도

잠길 듯 잠길 듯 가라앉는다

 

 


 

 

홍윤숙 시인 / 빈 항아리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을 담아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는 비어 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담아둘 꽃 한 송이 그리다가 스스로 한 묶음의 꽃이 된다 누군가 저처럼 비어서 출렁거리는 이 세상 어둡고 깊은 가슴을 찾아 그 가슴의 심장이 되고 싶어진다 빈 항아리는 비어서 충만한 샘이 된다  

 

 


 

 

홍윤숙 시인 / 쓸쓸함을 위하여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 세워

그 속을 걸어 다니고 싶다고 한다

나는 쓸모없이 널려있는 낡은 널빤지를 보면

모두 일으켜 세워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서까래를 얹고 지붕도 씌우고 문도 짜 달고

그렇게 집을 지어 무엇에 쓸 것인진 나도 모른다

다만 이 세상이 온통 비어서 너무 쓸쓸하여

어느 한 구석에라도 집을 지어 놓고

외로운 사람들 마음 텅 빈 사람들

그 집에 와서 다리 펴고 쉬어가면 좋겠다

때문에 날마다

의미 없이 버려진 언어들을 주워 일으켜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어 집 짓는 일에 골몰한다

나 같은 사람 마음 텅 비어 쓸쓸한 사람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작은 집 한 채 지어 놓고 가고 싶어

 

 


 

 

홍윤숙 시인 / 행복

 

 

한 잔의 차와

더불어 인생을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친구

한 송이 꽃과

기다리는 먼 곳의

그리운 엽서 한장

창밖에 그해의 첫눈이 내리는 날

예고 없이 반가운 사람 찾아와 주는

그 작은 행복을 그리건만

인생은 언제나

그 중 하나밖엔 허락하지 않는다.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어도

소식 오지 않고

언제나

혼자 마시는 차

혼자 바라보는 꽃

혼자 젖어서 돌아가는 눈길

 

 


 

 

홍윤숙 시인 /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바람 소리 귀 세워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는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下午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홍윤숙 시인 (1925~2015)

1925년 황해도 연백 출생. 동덕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 6·25 동란으로 학교를 중퇴. 1947년 <문예신보>에 <가을>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 <예술평론>에 <가마귀>를 발표하면서 등단.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원정(園丁)>이 당선.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1975년에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을, 1985년에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 1991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