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옥희 시인 / 안도(安島)의 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6.
권옥희 시인 / 안도(安島)의 밤

권옥희 시인 / 안도(安島)의 밤

 

 

어쩌면 지금이 전부였다

어둠의 궤적을 따라가다 다락방에 갇힌 섬

바다가 증발했다고 요란한 개구리 소리가 주인이 됐다

 

반짝반짝 빛나던 사랑은 그대 가슴으로 들어가고

별 하나 들어앉히지 못한 내 가슴이 까만 먹지로 갇힌 밤

 

안방같이 아늑하게 섬 깊숙이 들어온 바다가

하늘을 품은 이 길에서 길을 잃으면 눈물 날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이 전부 같기에

다락방에서는 어둠이 훨씬 수월할지 모른다

 

물미역이 되어 해저를 떠다니다가

마법 주문이라도 외운다면

등대의 한 점 불빛도 헛구역처럼 올라오지 않을까

 

실종 신고가 늦어도 실망하지 않으리

전부 같은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안도의 숨을 깊게 내쉬며

안도(安島)는 마을 앞까지 바다를 데려다 놓을 테니까.

 


 

권옥희 시인 / 다행이다

 

 

설탕 두 스푼은 결코 달달하지 않다

그 무게는25그램

자유로운 영혼의 무게도25그램

내 손바닥의 감각으로 가늠할 수 없는

내 눈에 낯설은 북방사막딱새

 

날아야 산다고,허공의 한 점으로

3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휘저었던

수억만 번의 날개 짓을 따라가는 바람은버겁지 않았을까

구름을 밀어낸 빗방울은 얼마나 날개를 짓눌렀을까

큰 새들은 스스로 갈 길을 터 주었을까

지구가 지금보다 컸다면

또 얼마나 더 날아야 했을까

 

“엄마,나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야죠”

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단단한 독수리 깃털 한 개가 부럽지 않다

본능으로 날아야 하는 세상 끝까지

비행시간 지구 한 바퀴다

게으를 틈 없이 열심히 사는 새는

주저앉지 않는다,꿈도 잃지 않는다

 

북방사막딱새가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나는 몇 번 웃고 몇 번 울었을까

죽지 않으려면 날아야 하는 새

살 길이 그 길 뿐인 작은 새

편안하고 풍요로운 아침의 시작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지구가 지금 크기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권옥희 시인 / 눈물은 슬픔의 말이랍니다

 

 

엄마 눈에 가을꽃이 피었나 봅니다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요

 

생목 넘어오는 슬픔의 맛은 다를지라도

쌓였던 눈물 칼질하듯 쏟아내라고

엄마는 눈으로 말합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위안

젖은 풍경이 주는 쓸쓸함과 혹은 그리움

궤도 이탈처럼 알맹이 다 빠져나간 껍데기에 갇혀

원인 모를 우울증을 앓을 때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가을꽃에는 복받치는 엄마 눈물이 녹아있나 봅니다

눈물이 말이 되어 슬픔을 녹입니다

 

언제나 그리운 엄마의 기일입니다

무성한 기억을 키운 하늘이 못 견디게 파랗습니다

핏줄까지 더듬어가며 보고 싶었다고

우리 엄마 불러봅니다.

 

 


 

 

권옥희 시인 / 버튼홀스티치*

 

 

 이 길은 올 풀린 기억이 삐져나오지 못하도록 팔순의 노모 허리 꺾어 기역자로 걷는 길이다 따라서 이 길은 더 이상 직선으로 갈 수 없다 불안에서 탄생한 ㄱ은 처음 나온 구멍 근처에서 자주 멈춘다 구멍은 길 위에서 흔들리는 실밥 같은 손짓을 안으로 쟁인다 늘 뾰족한 시간은 구멍을 향하여 한 땀 길 떠난다 마지막 좁은 바늘 길 둥글게 휘돌아 간다

 

 기역에서 기억으로 난 길이 춥다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멈출 수 없는 매듭의 위태로운 실의 시간을 허리 굽은 늙은 겨울이 걸어간다 최후의 바늘이 단추의 목을 감싸는 순간 길은 기억으로 둥글게 말린다

 

 그러므로 길 위에서 바늘의 행방을 묻지 말 것 마지막 길을 떠나는 허기진 물음표들, 억압과 자유,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순간이 찾아와도 언제나

 

 구멍을 향하여 바늘로 질문하는 한 땀의 생

 

 구멍은 늘 춥다

 

* 버튼홀 스티치 [buttonhole stitch] 주로 단춧구멍이나 가장자리의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휘갑쳐 뜨는 방법

 

 


 

 

권옥희 시인 / 아직도 쓰린 상처

 

 

슬픈 데도 눈물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무슨 청신호처럼 곪은 상처가 터지면

그 다음은 행복인가?

 

평야를 흘러가는 강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첫사랑 품은 하늘만 덩그러니 얹혀 있다

 

가을걷이 끝난 나락 밑둥마다

우글거리던 가난

배고픈 기억의 허기 속에서

자욱한 별똥별들의 상처가 아직도 쓰리다

 

네가 있어 미친 듯

그리움과 분노를 사랑했고

슬픈 데도 나지 않는 눈물로 아이를 낳았고

상처가 곪아 쌀이 되고

밥이 눈물이 되던 사랑

 

들판에 잘 묶여진 볏단이

흰 옷 입은 백성 같다

오늘은 당신도 그 안에 한 백성

슬픔에 길들여진 마음이 짠하다

 

 


 

 

권옥희 시인 / 술에 젖다

 

 

어느 날 내 사랑의 우물이 말랐다

사랑이 멈추면 온통 사막이라고

마음속 먼지들이 균열을 일으킨다

사랑을 안고 사는 꽃들은

사랑이 멈추면 때 없이 진다

애초에 몸속에 녹아있는 사랑

녹아서 온몸을 흐르다가 어느 한 곳이 막히면

그건 못 견딜 욕망이었다

 

가슴을 찢어 쓰린 잔을 들고 술에 젖으면

사랑의 마름질로 접혀진 불꽃 경계선을 너머

이 가슴 쓸어안을 그대가 없어 꽃이 진다

온기 없이 적막한 하루가 거칠게 달려가는 뒤로

붉은 노을이 대신 취하고

술에 젖은 채 말라버린 우물가를 서성이는 그대는

숲의 둔덕을 베어 문 바람처럼 어쩌지 못하고

흐려진 눈으로 애꿎은 꽃대만 꺾는다

 

 


 

 

권옥희 시인 / 등꽃, 사랑에 취하다

 

 

그래 몸이 먼저 안다

 

홀씨에 닿은 바람결에 엎드린 젖빛 사랑의 테러

 

날개 접은 나비를 맞으면 순식간에 신음이 터져 나온다

 

사랑을 채우려 한낮에도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꽃

 

감당 못 할 신열로 꽃잎 자락이 들뜨고

 

초점 약한 숨을 고르며 몸을 낮추어야 들리는 등꽃의 화음

 

연보랏빛 물결이 잇따라 울리는 종소리처럼 사랑에 취할 때

 

덮치듯 입술을 훔쳐 간 첫 키스의 두근거림은  

 

내 마음 뺏어가기에 잠깐이면 족했다

 

민달팽이 살처럼 뭉클했던 입술을 기억하며

 

사랑이 식기 전에 저 꽃방 하나 훔쳐야겠다.

 

 


 

권옥희 시인

1957년 경북 안동 출생. 필명: 권성은. 1992년 《시대문학》(현 문학시대)으로 등단. 시집 『마흔에 멎은 강』 『그리움의 저 편에서』 『사랑은 찰나였다』. 공저 『별난 것에 대한 애착』 『장미차를 생각함』 등 다수. 2004년 강서문학 본상 수상. 2017년 강서문학 대상 수상. 2021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디딤돌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회원. 강서문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