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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네잎 시인 / 우중雨中의 광장
광장은 사라지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가졌다 말들이 사라지고 빗소리가 범람하는 광장 물웅덩이에 떠 있는 꽃잎은 비언어적인 기호 광장을 횡단하는 동안 우리의 등은 오그라들었고 광장의 끝을 벗어나는 동안 우리의 이마에서는 촉수가 돋아났다 서로의 귀에 입술을 대어보고 우리는 투명 우산 속 우리가 광장을 횡단하는데 전 생애를 소비한 와우蝸牛종이라는 사실과 연체의 감정으로 벗어나는 일조차 태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느리게 놀란다 달팽이의 족적처럼 외로운 것을 본적이 있니? 우산 속 우리가 자웅동체라고? 너는 왼쪽에 비밀을 만들고 나는 오른쪽에 암호를 숨기는데 구름이 광장을 지배하는 날만 계속되었다 구름 속엔 죽은 목소리들이 떠돌고 우리는 우리라는 껍질을 완전히 벗는다
김네잎 시인 / 스프링클러
너에게 소환된 나는, 그러나 꿈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흉몽 위에 집이 하나 세워진다 먼 곳에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다 창문은 이미 깨져 버렀으니 한 쪽으로 쏠리는 감정은 위험하다 천천히 발병하는 식은 땀 마지막 호흡을 수습할 사람이 되기 싫어 꿈에 매몰된 너를 흔들어 깨운다 달아났던 이웃들이 돌아오고 있다 축축한 얼굴로 지난밤 누군가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줬더라면 네 옆에서 그들은 수다를 떨었을 텐데, 걱정하는 척을 한다 헤집을수록 고이는 검정, 헤집을수록 깊어지는 어둠을 그런데 네 잠은 왜 이렇게 긴 거니? -월간 〈모던포엠 〉(2021년 4월호)
김네잎 시인 /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악몽 쪽으로 잘못 들어선 밤입니다
벌어지고 있는 얼굴을 감싸 쥐고 한 사람이 뛰어갑니다 표정이 쏟아질까봐 멈출 수 없죠 갈 데까지 가 보려 하지만 광장은 자꾸 넓어지기만 합니다
그대로 끝까지 달려 달리지 않으면 넌 표정을 벗어날 수 없어, 목젖이 보이도록 광장이 소리칩니다
마스크를 쓴 군중과 피켓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멈춰 있으면 넌 표정조차 가질 수 없어, 또다시 목소리가 나를 부추깁니다
갑자기 비가 후드득 떨어집니다 후다닥 흩어집니다 나의 표정만 여백에 달라붙습니다
종종 나만 남아서 세상의 모든 악몽을 혼자 실천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빠져나오는 길을 알려준 적 없기에 영영 아침이 오지 않아요
*겉으로는 밝은 모습을 보이며 웃지만 속은 울고 있는 ‘숨겨진 우울증’
김네잎 시인 / 유령선
내가 떠밀려온 곳에 내가 서 있는, 이 좌표는 악몽일리 없어
막 당도한 기항지엔 항풍은 없고 두 손으로 수면을 가리키고 있는 흑암의 방식
범람하는 음악과 난파된 시간들이 굴러다니는 갑판 위 마지막은 비렸어 흩뿌려지는 이야기 유령의 입을 통해 선실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지
나는 2급 조리사, 출렁이는 것과 흔들리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감각을 가졌지 그러니 여전히 울기 전에 왜 울었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
5시간 전에 나는 눈물주를 찾는 손님에게 눈물을 따라 주었지 눈물을 탐식하는 취향에 관하여 텅 빈 동공을 보면서 잔을 들어 올리는 위안의 감정에 관하여 생각하는데 내 눈이 감기질 않아 물고기를 닮아가고 있었던 거야
생생한 층위의 식감을 찾는 손님들의 시선을 자르고 공기를 가르고 허공에 꽂힐 때 수평선 끝에서 너울이 너울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 보였지 식탁은 예감했기에 접시를 끝까지 떨어뜨리지 않았어 세이렌의 노래가 끝없이 방향키를 홀리고 있는데 말이야
오늘밤 나는 이곳에 내려야 하는데 짐을 챙겨야 하는데 가방에 가득 찬 물 쏟아도 쏟아지지 않는 물 옷이 왜 젖은 줄 모르게 젖어 있는지
-《한국동서문학》 2019. 겨울호
김네잎 시인 / π로 향하는 무한수열*
돌진했다 너는 빛조차 벗어날 수 없는 그곳으로 부피를 버리고 소실점을 껴안는다
탁자 위에 사과가 놓여있다 웜홀이 중심을 관통한 분명 넌 이곳을 지나고 있을 거다
사과를 창가로 옮긴다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에 기댄 채 어깨의 곡선이 허물어 질 때 내가 내내 옆 표정만 보고 있을 때 우리의 기연(奇緣)을 타고 흘러내리던 적막한 공백
공백에 깃든 별리 네가 끝내 빨려들어 간 블랙홀
뒤돌아서자마자 내 발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 방이 이렇게 넓었었나 너의 빈자리를 건너갈 수 없다
*라마누잔의 수학 이론–블랙홀, 양자이론, 끈이론 등의 연구에 응용된다.
김네잎 시인 / 잠적
외투를 찾으러 갑니다
남겨진 마음으로
마로니에 열매가 뒹구는 산책길과 부들이 일렁이는 물가와 점원이 할인 품목을 정리하고 있는 호수공원점 CU를 지나
못 쓰게 된 날개 대신 종종종 걷는 새처럼 걷다가 이름을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돌멩이처럼 머뭇거리다가
(사해는 쓰리고 아파, 그런데 자고새 요리는 맛있었어.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자고새 요리는 정말 맛있을까
생각하다가 온통 그 생각만하다가 하마터면 밤의 리듬을 놓칠 뻔했습니다
길섶엔 죄다 말라가는 꽃들 마른 꽃이 꾸는 꿈을 털면 악몽이 왈칵 쏟아지겠죠
외투를 찾으러 갑니다
거기에 잘 있을 줄 알아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런데 오늘 나는 외투를 걸치고 나왔습니까?
-계간 『포엠피플』 2023년 겨울호 발표.
김네잎 시인 / 동물행동학자 K
드디어 도착한 극점은 극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어둠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빛의 혼돈
펭귄이 줄줄이 태어났다 다 같이 검고 다 같이 흰 부모와 새끼들, 날씨는 가장 공평한 방식으로 생존을 궁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해가 지지 않거나 해가 뜨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점점 더 깊숙이 잠수하는 펭귄에게 위치기록계를 달았다 아무거나 먹지 마 일주일 치 한꺼번에 털어 넣지 마, 이런 당부는
펭귄에게 한 걸까 K 자신에게 한 걸까
가끔 기지로 가는 길을 잃는다 똑바로 걷는데 늘 한쪽으로 뱅뱅 돈다 사람마다 더 무거운 쪽이 있다
환장하게 환한 밤이 감옥 같아서 K는 펭귄보다 더 먼저 멸종을 택했을 거다
K가 남긴 기록장을 읽는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기 위해 맨 앞장부터 읽었다
깃 털이 좌우 대칭인 새는 날지 못한다 뜨는 힘이 발생하지 않으니까, 펭귄도 마찬가지였다 좌우가 다른 나는 언젠가 빙봉氷峯에 올라가 비행을 시도해 보려 한다
위치기록계를 달고 떠난 펭귄은 K에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계간 『P.S 시와징후』 2023 여름호 발표
김네잎 시인 / 수색조
난 눈을 뜨고 있는데 누가 나를 재웠을까 눈 위로 눈이 한없이 날린다
저녁이 나를 샅샅이 뒤지고 갔다 그런데도 꾸다 만 꿈처럼 잔상이다 이 생각은 꿈속인가 육체 속인가 여기저기 구멍 나 있다 어둠은 악몽과 흉몽과 길몽이 뒤엉킨 자리를 탐색하느라 불빛 속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놓치고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 삼삼오오 눈 밟는 소리 관목이 꺾이는 소리 수런거림 소란 마침내 흐느낌 이런 시나리오를 구성한 건 아니다
눈동자에 빛이 고인다 곧 깨질 것 같다
무엇을 찾습니까, 그들에게 묻는다 어떤 뒷모습은 언어를 벗어난 세계라서 윤곽을 알 수 있다
천사가 오는 데 왜 이리 긴 시간이 필요한가 괜찮다 잠은 넉넉하니까 나는 서서히 상할 테니까
-계간 『포엠피플』 2023년 겨울호 발표.
김네잎 시인 / 틔움*
좀 비켜 줄래요 그늘이 지네요 이 씨앗은 배양을 참 좋아해요
커튼이 없는 방에서 깨어나요 여백 없이 겹겹이 쌓여 있는 빛 나는 매번 과장되는데 왜 눈뜨면 지금인 걸까요
생장등이 켜지네요 정수리에 쏟아지는 광량 웃자란 기분
그녀가 늘 같은 표정을 갖는다는 건 어떤 희망일까요
빛의 반경 너머엔 생기를 잃은 바깥이 있어요 그녀는 무늬만 사람인 것 같아요 토양과 기후가 맞지 않아 시들어가는 식물처럼 보이네요 방의 표면에 퇴적되어 있는 물질처럼
혼곤한 그녀의 슬픔
싹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접시를 꺼내와요 나를 창가에 두고 접시 위에 떨어지는 눈물, 한숨, 편린
캄캄한 땅속에서 나가야겠어요
창문 너머엔 인공 호수가 있고 그녀와 함께 걷던 사람은 없고 인공 날씨는 너무 황홀하니,
어떻게든 그녀와 나는 시름시름 자라야겠어요
*모 전자회사에서 출시한 식물재배기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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