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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도 시인 / 새벽 비 새벽녘에 비 내린다 그 빗소리 잠결에 들었다 노인네의 잔약한 기침 소릴 들었다 헛간 기둥 매달린 삼십 촉 전구 유리병 꽂아 만든 화단 어스름 분꽃이 자분자분 비에 젖는다 맨드라미 몇 송이 비에 젖는다 앉을개에 앉아 고추 다듬던 어머니, 에 에취 재채기한다 더 자잖고 벌써 나왔니 잠기 묻은 말씀이 비에 젖는다 -시집 『백제시편』 에서
조재도 시인 / 뒤꼍
외할아버지 생신 때 삼이우지 애들 모여 앉아 오기작 오기작 아침밥 먹던 국민학교 하급 시절 똥지린 바지 엄마 몰래 갈아도 입던 따순 볕에 고사리 호박고지 무말랭이가 끄들끄들 숨죽어가던 올무에 걸린 산토끼 가죽 벗겨 추녀 끝에 달아도 놓던 장광 구석 떡시루 놓았던 자리 맨드라미 이슬 말리며 솟는 아침해 호박잎에 싼 미꾸라지 솔가지불에 구워도 먹던
조재도 시인 / 온암리
온암리는 고향 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자라난 논과 밭과 밥상보만한 하늘이 보이는 곳 산 따라 산자드락 따라 여기저기 놓인 돌보 열두 매기 중 제일 큰 동네 느티나무 보건소 옆 낡은 함석집 병신 자식과 바글바글 속끓이며 어머니가 사는 그 어머니의 아버지, 해방 때 박헌영일 만나도 보았다는 내게도 도깨비 주문 제갈공명 장가든 얘기 들려도 주던 지금은 죽어 산에 묻힌 외할아버지가 살았던 내 동무 순례, 순경에게 시집간, 순례 어머니 이따금 마실 와 소새부리로 조잘대던 칠갑산 천정호수에 주검으로 떠오른, 내 동무 순례, 순례 어머니가 살았던 밤이면 삵아지가 닭을 물어가고 여름이면 애장터에 여수가 울던 고샅마다 핀 감꽃 살구꽃 울 삭정이 따라 호박순 나팔꽃 애증의 순앵이 뻗어도 가던 어찌 보면 바람과 물과 일월이 가는 길 한 점 티끌과도 같은 또 어찌 보면 내 가슴속 완강히 뿌리내린 굴참나무 같은 어쩐지 섧고 어쩐지 쓸쓸하고 어쩐지 사그라드는 모닥불 온기도 같은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1 - 길
깨진 기왓장 진흙빛 꿈 솔숲 울리는 바람에 담배 연기 풀풀 날리어도 영혼의 갈증 낙엽 밑 흐르는 가늘은 샘물처럼 질기게 이어져 혹 잘못된 꿈은 아닐까 세상 어느 구석지 잔상(殘像)으로나 남아 있는 그 나라, 먼 마을 햇살 소보록한 이부자리 밑 따사로운 온기 같은 그 마을 가는 길 시대를 등진 나의 시선은 빛을 향한 징검다리 밟고 가는 그런 날엔 우리네 슬픔도 더디 말랐으면 좋겠네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2 - 성터
아마득한 것이 흘러갔나 봅니다. 수수밭을 흔들며 다홍빛 감잎을 떨구며 돌틈을 흐르는 시냇물보다 바삐, 바람으로 햇빛으로 맑고 찬 가을의 기운으로 그러니 마음인들 언제 적 마음이겠습니까. 허공에 휘우듬히 뻗은 난초 잎처럼 오래도록 이승에 걸어두고 싶던 그때 그 옛사람의 마음인들 뼈는 바람에 실리어가고 흔적만 남은 자리. 쑥대를 안고 잠자리 조을고, 따순 볕만 쟁알쟁알, 대낮에도 풀여치 울음이 빈 그물로 땅에 나립니다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3 - 노을
까치발 딛고 서서 아스라이 내다보면 천년의 저 탑신(塔神) 너머 호박빛 노을, 나지막한 지붕, 버젓이 열린 부엌문 틈, 다홍빛 불꽃, 사내는 잎나무 그러넣어 아궁이에 불 지피고 허리 구부슴히 솥의 물 가셔내는 아낙, 사내와 아낙의 도른도른 말소리 뭉싯뭉싯 김 오르는 부엌을 향해 시장기 새김질하는 암소의 입김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6 - 슬픈 인화(印畵)
어둑새벽 굴품한 속에 무 한 쪽 저며 먹고 풀대궁처럼 야윈 어머니 알무릎 세워 서리서리 이어가는 가늘은 삼(麻)줄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11 - 내가 이어가는 것은
누천 년 전 깨어난 당신의, 하늘과 들과 산을 우러러 살다 간 당신의 혼을 이렇게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세월의 이랑을 뛰어넘은 정념일까 명주실보다 길게 가늘게 핏속에 고이 고인 정의 오래기 때문일까 아님 사상인가 선홍빛 아가미 처럼 발닥발닥 숨쉬는 정수리에 박힌 사상 때문일까 채곡채곡 쌓인 꽃잎 헤치어 보면 환하게 열리는 봄날의 향원(香園) 그래, 아니야 당신의 가락을 말을 나의 유년과 잇닿아 있는 그 질그릇 빛 세계를 전통처럼 내가 이어가는 것은 오히려 높디높은 상고대(上古代)의 하늘 남아 있기 때문
조재도 시인 / 백제시편 13 - 반가사유상
삶이 그렇게 바쁜 것은 아니리 앉아서야 들리는 돈오(頓悟)의 말씀 무쇠 소의 정수리 빠개치는 말씀 그 미소 띨락 말락 천년을 앉아 서성이는 우릴 인도하는 저 손가락
조재도 시인 / 소
동네 고샅에서 암소의 등을 타고 눈깔 희번덕대던 황소가 있었다 그때는 소에게도 사람처럼 복닥복닥한 신을 삼아 신기던 노인이 더러 있었다 소는 한 식구여서 한데 날이 차면 덕석을 해 입혔고 체해 음울해하면 바소로 발굽을 따주기도 하였다 열다섯 살 스무 살 난 소가 여러 마리 있었다 우리집에도 어머니와 함께 늙어온 소가 있었다 뿔이 마르고 목덜미가 가스러지고 휑뎅그렁한 눈밑에 자줏빛 눈물 자국 슨연하기만 한 그 소 팔아 아버지 병원비에 다 썼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도 나는 짐짓 못 들은 척하였다 조재도 시인 / 별리 이발관
사과나무에 순 돋아 주인은 순 집으러 갔단다 뻐꾸기 울음 논물에 풀려 주인은 또 모내기하러 갔단다 추사고택서 고덕 가는 길 그 새 중간 별리 이발관 몇 번 허탕치다 다시 가보니 이발관 주인 석유 곤로에 징게미를 끓이고 있다 예당 저수지 더듬어 떠왔다는 쩨깐한 새우 내가 의자에 오르니 비로소 그 주인 느리적 느리적 가위를 든다 가위질 소리가 空寂의 빗소리이다 나는 몸에 흰 포를 두른 채 졸다 깨다 다시 조은다 이발관 냄내가 나를 울린다 그때도 나는 키가 모자라 의자 위 널빤지에 앉아 있었다 기계독 오른 내게 구운 쥐고기를 먹으라던 이야기 방앗간집 아들이 누나 친구를 어찌어찌했다는 이야기 칠순 난 노인네가 죽은 누나 친구 염하는데 브래지어가 뭔지 몰라 그냥 가위로 끊어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나는 아득히도 슬펐다 우리 동네 상호도 큰 거울도 없던 이발관에서 들은 그 이야기를 사각이는 가위질 소리에 다시 듣는다 내가 아는 이 세상 제일 조용한 곳 별리 이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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