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송정란 시인 / 추억을 재생하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9.
송정란 시인 / 추억을 재생하다

송정란 시인 / 추억을 재생하다

 

 

흘러간 유행가를

누군가 흥얼거린다

 

바늘끝같은 기억들,

마음의 패인 골을 따라

 

추억은 재생되는 것이다.

저 달빛처럼 희미하게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줄이야'

 

낡아빠진 LP판의 홈을

다시 후벼 파내며

 

마음의 오랜 상처를 더듬어

울어대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추억의 서글픈

잡음들이 찌직거리며

 

가슴을 찢어놓는 것이다.

숨통을 막는 것이다

 

-시조집 <허튼층쌓기>에서

 

 


 

 

송정란 시인 / 시선(視線)

 

 

나뭇가지 사이에 내 영혼의 집

한 채 빌려 두었지

허공을 날아다니다 잠시

이파리에 기대어 쉬고 있는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내 영혼, 날개를 접으며

굴참나무 가지에 머무르곤 하였지

새떼를 좇아 서쪽 하늘 끝까지 따라갔다

홀로 되돌아와

회색빛 작은 새알 가지런한

작은 둥우리 속에 잠시

지친 몸을 눕혀 놓곤 하였지

 

 


 

 

송정란 시인 / 선운사 동백나무 가지 끝, 달을 가리키다

 

 

모든 것이 환(幻)이었다, 헛것이었다, 무명(無明)이었다

푸른 잎만 무성한 한여름의 동백나무

허공에 피었다가 진, 붉은 꽃잎을 본 것은...

 

 


 

 

송정란 시인 / 표본벌레

 

 

몸 속 흘러들어온 바늘에

나는 꽂혀진다

이런 식으로 살고싶지 않다고

버둥거릴수록 점점 깊숙이 박혀오는

대못처럼 단단한 길,

때로는 은빛 날개를 부비며 노래하지만

깨어나면 또다시 제자리에 있는,

얼마나 많은 바늘들이 내 삶을 관통해 갔는가

 

날이 갈수록 나프타린 속으로 녹아 들어간

아쉽고 쓰라린 추억들이 생생하게

코를 찌르는데

죽은듯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

황갈색 반질거리는 털의 윤기를 위해

오래도록 내 삶이 제 모습대로 기억되기 위해

몸부림처럼 돋아나오는 은빛 날개를 접는다

반짝거리는 셀룰로이드 투명한 막

하나 차이의

쉽게 날아 오를 수 있는 상자 밖 푸른 세상과의

거리에 대해 잊고 살기로 한다

 

아프게 찔러오던 바늘들이

쉽사리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뼈대가 되어감을,

나는 몸 속 흘러들어온 길을

말없이 따라 걷는다

 

 


 

 

송정란 시인 / 적(寂),집(執)

 

 

적(寂)

 

입춘 지나 남해바닷가 꽃몽우리 필 듯 말 듯

동백꽃 고운 선혈이 잎새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이른 봄 초경 치른 계집아이 새초롬하게 숨어 있네

 

저 꽃망울 활짝 피어나 지고피고 또 지고피고

이윽고 폐경을 지나 적막강산 내 속엣것

동백꽃 피었다 진 자리 자취도 없네, 속절없네

 

 

집(執)

 

감비나무* 이파리가 수작을 걸어오더군

침엽의 손끝으로 내 마음 간질이더군

맹세코 늘 푸른 계절이라고

믿어달라고 속삭이더군

 

너 없인 못살겠다던 연분홍 봄날도 가고

볼장 다 봤다는 듯 바늘끝처럼 쏟아내는

침엽수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함부로 내키는 대로 웃자라 저만치 멀리

너는 못된 나무, 곁눈조차 주지 않는

미친 듯 더 가까이 다가가

찔리고 마는 내 심사는,

 

* 가문비나무

 

-《가히》 2023, 여름호

 

 


 

 

송정란 시인 / 희망

 

 

저 어두운 바닥 깊이

가라앉을 때마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올리는

내 영혼의

부력

 

 


 

 

송정란 시인 / 조調

 

 

 대폿집 들창 너머 젓가락 장단 흘러나오네

 교자상 모서리를 패도록 두들겨대네

 얼씨구, 엉덩이장단 어깨장단 들썩이네

 

 옛적 한양의 이세춘이 도포 자락 길게 휘날리며 시절가를 부를 적에 장단을 새로이 자르고 늘이고 촘촘히 나누고 붙이고 질탕한 가락으로 조선 천지를 사로잡아 온갖 기생 가객 풍류객들이 이를 따라 부르기에 바빴거늘*

 

 한 젓가락 반 박자 늦게

 세 젓가락 연달아 치고

 흥이 넘쳐흘러 엇박으로 메기다가

 절씨구, 시를 절로 쓰려거든

 박자 가지고 놀아야지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로서, 영조 때 신광수의 문집 石北集에 시조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당대 가객 이세춘이 시조시에 새로이 장단을 붙였다는 구절이 있다.

 

-《가히》 2023. 여름호

 

 


 

 

송정란 시인 / 술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네

 

 

술항아리 가득 흔들리는 나를 보네

마음은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내 마음을 거느리지 못하네

대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면

그 어느 것도 걸리적거리지 않고

그 어느 곳에서도 나를 건져 올릴 수 없지

쩍쩍 갈라진 갈증 속으로

벌컥벌컥 하염없이 들어갈 뿐이지

어둠 속에 어둠인지

빛인지 항아리인지 소용돌이치는 대로

모서리마다 부딪혀 둥글고 둥근 세상을 만나고

고요하면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내 살이

내 뼈가

물결로 흐른다네

온 몸 흥건히 젖고 젖어

수만 갈래 물길이 한꺼번에 열리면

술항아리 가득 넘쳐 흐르는

물방울 별이 되어 나는 즐겁게

즐겁게 엎질러지네

 

 


 

송정란(宋貞蘭) 시인

1958년 경북 영주 출생. 건국대 법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199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199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 수혜(시집 <화목> 발간). 1994년 제1시집 『불의 시집』 출간.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첫 시조집 <허튼층쌓기>. 현재 건양대 강의전임강사. 문학과 창작 편집국장, 경기대, 한양대, 서울여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