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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리 시인 / 지금 오는 이 이별은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에서
박규리 시인 / 새벽별
외로움도 오래되면 온몸 따스히 데워주는 것인지, 홀로 뽑아낸 거미줄 같은 길이 달빛에 하얗 게 내려앉는 밤이면,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 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목젖을 적시는 묵은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다가, 붉은 홍시 위로 가을비 번져오는 신새벽, 오줌 누러 뛰어가면 오돌오돌 떠는 어깨 뒤를, 어느결엔가 당신은 다가와 꿈결인 듯 나를 감싸안기도 합디다...
박규리 시인 / 저, 앗찔한 잇꽃 좀 보소
보따리 풀어놓고 어둔 방안에 앉은 당신을 보니 참말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네 그동안......어찌.......살았는가......다 접어둠세..... 새끼들 두고 도주한 자네 심정 생각하면 그 사연 소설 몇 권 안 되겠나 피차 누굴 원망하겠는가 내 죄 더 큼세 저 꼼지락대는 것들 눈앞에 감감하여 농약병도 깊숙이 넣어둔 지 나도 꽤 오래네 자네 없이 살아보니 말이네만 내 속이 깊지 못했네 축사를 덮는 골판 지붕에 도 왜 있잖은가 푹푹 골이 잘 져야 빗물이건 눈물이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던가 제 몸의 골도 잘 파여야 하다못해 지나는 바람 한 줄기 편히 흘러내리지 않던가 긴말 할 것 없네 몇 년 사이에 골 깊어진 이맛살을 보니 이녁 마음살도 터졌네..... 한잔 더 하려고 들 고 온 술인데 잘 되었구만 쭉, 드소! 암말 말고 눈물바람도 치우고, 저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 스미듯, 맺힌 맘 모진 세월 휘이휘 이 가슴팍 아래로 흘려내리소 자, 자 이쪽 툇마루쪽으로 좀 나와보소 아, 눈물에 부대낀 만큼 파이고 낮아지지 않는 세월 봤는 가........저기, 아찔한 연분홍, 잇꽃 부푼 것 좀 보소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박규리 시인 / 천리향 사태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집을 진동하여 차마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어젯밤 산행(山行) 온 젊은 여자 둘 대체 그중 누가 나와 내 방 앞을 서성이나 젊은 사미승 참다못해 문을 여니 법당 뒤로 언뜻 검은 머리 숨는 게 아닌가 콩당콩당 뛰는 가슴 허리 춤에 잡아내리고 살금살금 법당 뒤로 뒤꿈치 들고 접어드니 바람처럼 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아, 참을 수 없는……내……음……오호라 거기라고, 거기서 기다린다고 이번에는 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 이 환.장.할.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 밤새 동쪽 종각에서 서쪽 아래 토굴까지 남몰래 돌고 돌다가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 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이제 오도가도 못해서 홀로 돌고 돌다가…… 천리향, 천리향이었다니… …눈물 핑 돌아서
-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작과 비평, 2004)
박규리 시인 / 주름 제 얼굴 제가 만든다는 말 무엇인가 했는데 지울 수 없는 사연 건너뛰지 못한 세월 골골이 주름으로 잡혀 내 얼굴이 되었다 웃음 하나에 주름 하나 서러움 하나에 주름 하나 이렇듯 살가운 사정과 스산한 과거 내게도 있었는가 누군가에게 몸 버리고 떠돌던 흔적과 양미간 깊이 팬 상처 그러나 생각하면, 내 주름은 또다른 누구의 주름이 아니었으리 나 때문에 눈물 흘리던 사람이여 나 때문에 섧게 섧게 속 태우던 사람이여 내 철없는 욕심과 부질없는 사랑이 상처 한줄 그을 줄 차마 어찌 알았으랴 언제부터였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주름과 주름이 섞이는 일이라는 걸 짐작한 뒤부터 내가 먼저 한줄 주름으로 눕게 될까봐 그대에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깊은 주름으로 쓸쓸히 접히게 될까봐 짐짓 딴전이나 피우다 먼데로 말꼬리 흘린 적 참 많았다
박규리 시인 / 청매화
다른 길은 없었는가 청매화 꽃잎 속살을 찢고 봄날도 하얗게 일어섰다 그 꽃잎보다 푸르고 눈부신 스물세살 청춘 오늘 짧게 올려 깎은 머리에서 아직 빛나는데 네가 좋아하는 씨드니의 푸른 바다도 인사동 네거리의 생맥주집도 그대로다 그 사람 떠나고 다시 꽃핀 자리마저 용서했다더니 청매화 꽃잎 꿈결처럼 날리는, 오늘 채 여물지도 않은 솜털을 야무지게 털어내다니 정말 다른 길 없었더냐 새벽이면 동학사로 떠날 이른봄 푸른 이끼 같은 아이야 여벌로 더 장만한 안경과 흰 고무신 한 컬레 머리맡에 챙겨놓고 잠든 너의 죄 없는 꿈을 마지막으로 쳐다보다 눈부시도록 추울 앞날을 위해 이 봄날, 떨리는 손으로 두툼한 겨울 내복 두 벌 가방 깊숙이 몰래 넣었다
- 시집〈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박규리 시인 / 승속 사이에 있는 것
빈둥빈둥 놀던 보살이 먼 길 다녀오신 스님께 밥이 없다며 기어코 마을 식당 쌈밥집에 들었지요 온갖 야채 푸짐히 나온 뒤 불판이 놓이고 그 위로 삼겹살이 얹혔는데요 노스님은 상추 몇 잎 손바닥에 펴들고 무심코 고기 한점 집다가 얼른 놓았어요 보살은 속으로 히히거리며 젓가락질을 빨리 하는데 푸성귀와 김치만으로 밥 한 그릇 떠억 비운 노스님이 잘 되얐다. 이참에 꼭 대접할 이가 따로 있다시며 식당 주인을 불러 다 구워놓은 삼겹살을 포장시키는 거예요 실컷 먹지 못해 볼이 부은 보살이 구운 삼겹살이 담긴 비닐봉지 달랑 터덜터덜 노스님 따라 절로 들어서는데 장독대 위에 늘어져 있던 고양이가 야아옹 댓돌 위 고무신을 물고 흔들던 강아지가 멍멍멍 대추나무 볼 붉은 대추알도 덩달아 흔들거려요 노스님이 법당을 오르시며 보살에게 턱짓을 하셨지만요 보살은 희번득 입가에 미소 흘리고요 햇살 가득한 마당에 첨벙첨벙 발을 담그며 새끼 밴 고양이와 철없는 강아지는 스님만 쫓아가지요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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