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하 시인 / 그리운 가을
가을이 무척 그립습니다
그는 큰 키에 깊은 눈을 가고 있습니다
가슴 깊숙이 붉은 씨방을 갖고 있습니다
우기에 접어든 나날들
드리워진 숲들만 무성하고
열기와 빗물과 기다림들이
그의 깊이 모를 가슴을 겨냥합니다
소슬바람이 불어올 때
하늘이 쓸쓸할 때
가을은 온몸을 태워
곳곳에 가슴 미어지도록 무르익은 세상을
화색나게 펼칠걸요
열기와 빗물과 기다림들이
밀화 속 벌처럼 그에게로 스며들어 죽을걸요
그 세상 속에 나도 녹아
붉디붉은 말들을 쏟아놓고 말걸요
맺은 것을 알알이 터트려
그의 언덕 가득 파종되는 꿈이 되고 말걸요
-시집 [비가 오면 입구가 생긴다] 에서
정상하 시인 / 거미줄
강을 질러 마을을 질러 집 한 채의 뜰을 질러 문과 문을 마주보는 공허를 문턱에 걸려 머뭇거리는 시절을 등 돌린 사랑들을 참아냄과 살아냄을 눈물 속에 무수히 떠오르는 작은 꽃잎들을 꽃잎들이 내뿜는 향긋한 슬픔을 슬픔 뒤에서 반짝이는 별빛들을 절벽 아래 저 막막한 삶의 벌판을 그곳을 바라보는 두려운 꿈을쨍그랑 깨질 것 같은 아픔 그 투명함을 길러 거미줄 말끔히 하늘 머금다.
정상하 시인 /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차가 있었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기차 안팎에서 문득문득 사람들이 태어났다 창밖 멀리서 한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태어났다 흰 새떼가 앉은 소나무가 태어났다 손을 잡은 남자와 여자가 태어났다 뒷칸에서 야이 나쁜 놈아 이 도둑놈아, 멱살을 잡고 싸우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어느 낯선 역을 지날 때 눈부신 창밖을 지나가는 아버지가 태어났다 아버지, 지금은 어디서 사세요, 그때 터널이 시작되었고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을 휘돌며 강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언덕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했다 어느 외곽에서 어머니가 깜깜하게 내리고 빈 의자에는 곧 가을이 왔다 태어난 것들이 울창하게 뿌리를 내렸다 무성하게 자란 아이들이 창밖 풍경으로 스쳐갔다 같은 풍경들은 또 태어나고 스쳐가고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상하 시인 / 물끄러미 나는 나로부터 먼 데 서 있었다 내가 비에 젖어도 나는 젖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 떨고 있는 내가 있고 눈발의 건너편에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등이 허전했다 새 잎이 혼자 돋아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새 고양이가 울고 밤새 고양이가 남았다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나고 나는 남았다
마루는 마루끼리 멀고 벽은 벽끼리 멀었다
우리는 각각 제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각 옷에 묻은 풀벌레 울음이나 뜯고 있었다 혼자 견디다가 혼자 죽는 것을 아득히 보고 있었다 누구도 누구를 흔들어 일으킬 말이 없었다 -시집 『사과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2020. 지혜
정상하 시인 / 흔들리는 풍경화
나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내 안 그 아득한 바깥 그림 한 폭 걸려 있다 외로움이다 때로는 황량함이다 그림도 나처럼 쏠쏠하다
안과 밖의 분계선에서 내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그들의 얼굴이 낯설다
들어오렴
바람이 부는 창밖 스산함도 언제나 내 안으로 길을 내는구나
뚜벅뚜벅 이리로 걸어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일생 하나 나를 무성하게 점유한 후 그도 저 혼자 흔들리는 풍경화
-시집 <비가 오면 입구가 생긴다>에서
정상하 시인 / 흔들리는 풍경화
나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내 안 그 아득한 바깥 그림 한 폭 걸려 있다 외로움이다 때로는 황량함이다 그림도 나처럼 쏠쏠하다
안과 밖의 분계선에서 내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그들의 얼굴이 낯설다
들어오렴
바람이 부는 창밖 스산함도 언제나 내 안으로 길을 내는구나
뚜벅뚜벅 이리로 걸어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일생 하나 나를 무성하게 점유한 후 그도 저 혼자 흔들리는 풍경화다
정상하 시인 / 근황
우거진 나뭇잎에 가려져 뒷마당이 보이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끌며 다니던 옆 동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양살구가 햇살 받은 만큼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채운 촛불을 시위라고 축제라고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진주행 버스를 타고 혼자 골목을 더듬다가 밤중에 돌아왔다
또 한 사람 소식이 끊어지고 세 번째의 여름이 왔다
무거운 나를 밀던 바람이 탁탁 손을 털고 갔다
그렇게 여름은 포개지고 삭아서 다른 계절에게 거름이 되었다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다*
오래 앓던 민희자씨가 죽어 상수리나무 아래 묻혔다
회화나무가 허공에 꽃줄기를 내어 앉혔다
내가 읽지 못하는 꽃줄기를 참새나 저녁이 한참 읽었다
공원으로 걸어가 연못에 나를 비춰보았다
나는 점점 희미해져 아무것에도 반사되지 않았다
*발페의 오페라<보헤미안 소녀>중에서
정상하 시인 / 이유
오늘 거기 예약했는데요 눈보라가 무섭다는 사람이 있어서 어쩌지요? 눈 속에서 헤매던 기억이 끔찍하다고 하네요 이 말을 하니까 눈 속에서 길을 잃은 영화 속 주인공이 떠오르지요? 거기가 시베리아였던가요? 어디면 어떠냐고요? 2차선 도로에서 시동이 꺼졌다고 양쪽 길이 다 막혔다고 외곽에서 오는 사람이 전화를 했네요 밤중에나 도착할지 모르겠다고요 모자를 못 찾아서 꼼짝 못한다는 사람도 있네요 너무 추워서 후드 안에 털모자를 꼭 써야 한다고요 모자가 없어진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하네요 어느 집은 밖으로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도 하고요 문이 얼었을까요? 가서 밖에서 문을 열어주라고요? 집을 몰라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마미비아로 간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고요 적갈색 모래 능선을 뭉게뭉게 찍어 보내며 적갈색이 자신과 잘 맞는다고 자랑을 하는데 아주 돌아오지 않을 사람 같아요 점심 약속 같은 건 아예 잊은 듯요 오랫동안 얼음판을 지나온 사람이 이젠 더 이상 얼음 위를 걸을 발바닥이 없다고 하네요 한 사람 뜬금없이 우리가 언제 약속을 했냐고 따지네요
담에 가겠습니다
-시집 <비가 오면 입구가 생긴다>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재홍 시인 / 시래기 국밥 외 5편 (0) | 2025.10.09 |
|---|---|
| 김영미 시인(양평) / 석양의 식탁 외 4편 (0) | 2025.10.09 |
| 고정애 시인 / 심전도 검사장에서 외 6편 (0) | 2025.10.08 |
| 이동우 시인 / 용서를 강요받을 때 외 6편 (0) | 2025.10.08 |
| 박남주 시인 / 상처는 아름답다 외 6편 (0) | 2025.10.08 |